"저금리 문제있다"...집값 잡으려 한은 압박한 대통령[대통령 연설 읽기]

입력 2022-07-16 08:01   수정 2022-07-17 11:15

“7년간 이어진 저금리 시대가 끝났다.”

한국은행이 지난 13일 사상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을 밟으면서 시중은행들은 빠르게 수신금리 인상에 나섰다. 은행권이 이처럼 신속하게 대응한 것은 정치권과 금융당국의 지속적인 ‘시그널’ 때문이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권을 향해 ‘이자 장사’를 경고하자 은행들은 대출상품 금리 상품을 일제히 낮췄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직접 금리 인상이나 인하를 주문하는 것은 ‘관치 금융’으로 비칠 수 있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리 조정을 놓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이전에도 있었다. 특히 정권 교체기 때마다 경기 부양을 원하는 정부와 물가 관리가 최우선인 한국은행의 입장이 부딪히면서 불협화음이 새어 나왔다. 때로는 한쪽이 납작 엎드리고, 때로는 전면전을 벌이면서 통화정책의 ‘방향’을 탐색해왔다.

그 때 그 시절, 비현실적인 이자 30%

“적은 돈이라도 한푼 한푼 모이고 쌓이면 거대한 산업자금을 이루어 투자를 확대할 수 있게 된다”(1965년 9월 범국민 저축운동 담화문 중)

저축이 미덕이자 애국이었던 시대,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저축의 날’ 제정 1년 만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금리 현실화’ 조치를 내놨다. 당시 연 15%에 달했던 예금금리는 단숨에 두 배 가까이 오르게 된다. 은행에 쌓인 자금은 자기자본 조달이 어려웠던 기업들이 낮은 금리로 끌어다 수출과 산업화 자금으로 썼다.

전두환 정부도 민간저축을 독려해 제조업으로 자금이 흘러가도록 했다. 전 전 대통령은 1985년 10월 한 1986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외채에 계속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라며 “외채 없이 투자 재원 모두를 우리 힘으로 조달하기 위해서는 저축률을 3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주도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금리가 철저한 정부 통제하에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93년 4월 경제장관회의에서 경기 활성화를 위한 금리 인하를 지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해 6개월 미만 예금을 제외한 모든 금리 표를 없애는 ‘금리 자유화’도 시행했다. 은행들은 설립 후 처음으로 서로 다른 여·수신 금리를 제시하며 경쟁 체제로 들어갔다. 4년 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1998년 3월까지 연 20~30%의 살인적 고금리가 유지됐다.

후폭풍으로 경기침체가 심화하고 흑자 도산이 이어지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5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저도 젊었을 때는 해운업을 해서 돈도 벌고 지방신문사 사장을 했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고충을 잘 안다”며 “금리가 높아서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있는데 30% 콜금리, 3년 만기 회사채의 금리를 20% 이하로 내리겠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이 발언으로 취임 초 연 30%까지 치솟았던 금리는 1년여 뒤 연 4%대로 내려왔다.

2004년 부동산 가격 폭등에 놀란 노무현 정부는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그해 11월 연 3.25%에 달했던 기준금리는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8월(연 5.25%)까지 8차례에 걸쳐 0.25%포인트씩 올랐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며 세계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경쟁적으로 낮추기 시작했다. 2011년 6월 연 3.25%였던 기준금리는 다시 0.25%포인트씩 8차례에 걸쳐 인하해 2016년 6월 연 1.25%까지 내려갔다. 문재인 정부 들어 2018년 11월부터 또다시 금리 인하를 단행, 2020년 5월 연 0.5%까지 역대 최저치로 떨어뜨렸다.

권력에 휘둘렸던 한국은행…새 정부 출범 때마다 ‘신경전’
통화정책 결정자인 한국은행은 1950년 설립된 이후 오랜 기간 정부의 들러리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 시절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금융통화위원회 수장도 당시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맡아 ‘남대문 출장소’라고 불렸다. 총재 임명권을 대통령이 쥐고 있는 만큼 정부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1997년 한국은행법이 개정되면서 독립기관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이때 금통위원장도 한은 총재가 겸임하게 됐다.

한은이 정부의 단기 부양책에 휘둘리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로 시행됐지만, 정부와의 신경전은 끊이지 않았다. 2004년 12월 파리를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프랑스 경제인연합회 주최 조찬 간담회에서 “한국 정부는 적극적이고 유연한 재정?통화정책을 운용해 경기둔화에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금통위를 이틀 앞두고 금리를 지금보다 더 내리도록 촉구한 것이다.



‘747 공약’을 내세운 이명박 전 대통령도 노골적인 금리 인하를 요구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그해 10월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불을 끌 때는 초기에 충분한 물을 부어 단시간에 진화해야 한다”며 선제적인 금리 인하를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 ‘매파’였던 이성태 전 한은 총재는 예상과 달리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청와대와 정면충돌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9년 1월 금통위 회의를 앞두고 “금리를 더 낮출 수 있는 정책을 펼 수 있다”고 발언하는 등 압박 강도를 더욱 높였다. ‘열석발언권’을 놓고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다. 열석발언권은 금통위 회의에 정부(기획재정부 또는 금융위원회) 인사가 참석해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하는데, 사문화됐던 이 제도는 이명박 정부 들어 38차례나 행사됐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 가장 잡음이 컸다. 박근혜 정부도 취임 직후부터 “한은이 금리를 내려주면 좋다”며 여러 차례 압박했다. 이 발언으로 김중수 당시 한은 총재는 2013년 3월 박 정부 들어 처음 열렸던 경제금융점검회의(서별관회의)에 돌연 불참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05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금리 인하에 관해서는 적기에 대응하겠다”고 말해 파장이 일었다.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은 아니지만, 그의 복심으로 불렸던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척하면 척’ 발언은 지금도 회자된다. 최 전 부총리는 2014년 9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 중 이주열 당시 한은 총재와 만난 뒤 “금리의 금자 얘기도 안 했지만 ‘척하면 척’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굳이 말 안 해도 한은이 알아서 금리를 내리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해석됐다.

문재인 정부에선 집값을 잡기 위한 대출금리 조절용으로 한은을 압박해 논란이 됐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8월 경제보좌관을 통해 “기준금리가 연 1.25%인 상황은 사실은 좀 문제가 있다”는 말을 에둘러 전했다. 이후 이낙연 국무총리가 2018년 9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기준금리 인상을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됐다”고 밝힌 데 이어 김현미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도 “저금리로 인한 유동성 과잉이 집값 급등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언급했다.

서희연 기자 cub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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