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고문실인줄 알았다면 건축가도 가해자 아닌가"

입력 2023-02-26 17:46   수정 2023-02-27 00:38


“자신이 만든 칼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줄 알았다면, 칼을 무디게라도 만들었어야 하지 않을까.”(연극 ‘미궁의 설계자’ 중에서)

지난 17일부터 26일까지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미궁의 설계자’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김수근은 서울 여의도 개발과 경부고속도로 기본계획 등 군사정권에서 굵직한 국책 사업을 도맡은 건축가다.

연극은 이른바 ‘고문 공장’으로 불릴 정도로 비인권적 시설을 만든 김수근에게 어두운 역사의 책임을 묻는다. 1976년 서울 용산구에 지어진 남영동 대공분실은 6월 항쟁(1987년)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 장소다. 안경모 연출가는 제작발표회에서 “건축 도면에 펼쳐진 무형의 세계가 어떻게 구체적인 고문 피해로 이어졌는지를 무대 언어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연극은 건물 설계 의뢰가 들어온 1975년과 한창 고문이 이뤄진 1986년 그리고 극본이 쓰여진 2020년, 이 세 시대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1975년 건축사무소의 양신호는 대공분실이 설계되는 과정을, 1986년 고문당한 송경수는 이 공간이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에 이용됐는지를 보여준다. 2020년의 다큐멘터리 감독 권나은은 대공분실과 김수근을 둘러싼 역사적 해석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살인에 쓰인 칼이 있다면, 그 칼을 만든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게 이 연극의 메시지다. 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약 5㎡의 좁은 방, 물고문에 사용된 방안 작은 욕조, 맞은편 방을 볼 수 없도록 서로 엇갈리게 난 문…. 이 모든 건축적 요소를 설계한 건축가는 사실상 고문의 또 다른 가해자라며 김수근을 향해 단죄의 목소리를 높인다.

연극은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도 시의성 있는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권력의 부당한 압박 앞에서 타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작품 속 신호의 고뇌를 바라보며 차마 ‘저항하라’고 망설임 없이 외칠 수 없는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든다.

소박하지만 효과적인 무대 디자인이 소극장에 잘 어울린다. 고문실은 간단한 선으로 표현됐을 뿐이지만 섬뜩한 상상을 자극한다. 물리적 폭력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안무와 조명, 소리 등을 활용했다.

공연 장소인 아르코예술극장은 김수근이 설계한 또 다른 건물이기도 하다. 관람을 마친 뒤 그가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에도 있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게 된다. 작품은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연극부문에 선정돼 공연화됐다. 창작산실 프로그램을 통해 무대로 올려진 작품은 다시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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