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엉터리 역사의 재구성

입력 2023-08-17 17:46   수정 2023-08-18 00:25

얼마 전 50대 후반의 한 대학 교수가 서재에서 제일 소중한 책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을 소개하는 걸 보았다. 그 책의 요지는 이렇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터진 전쟁은 ‘내용상으로는’ 북에 의해 그날 시작된 게 아니다. 냉전시대의 국제전과 북남 내전, 이 두 ‘상황’이 혼합돼 진행된 것이므로 ‘6·25전쟁’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맞다. 남침이 유도된 측면마저 있다.’ 1980년대 남한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던 이른바 ‘수정주의이론’이다.

2009년 2월 9일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에서는 정조(正祖)가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領袖) 우의정 심환지(沈煥之)에게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보낸 편지 297통이 공개됐다. 겉봉투 입구마다 봉함인(封緘印)이 찍혀 있고 읽은 뒤 반드시 폐기하라는 명령이 지속적이었기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료였다.

1799년 3월 6일 편지에서 정조는 심환지에게 내일 정치 현안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다가 대전(大殿) 밖 섬돌 아래로 내려가 관모(冠帽)를 벗고 견책을 청하라고 지시한다. 다음날 심환지는 정말 그렇게 해 파직되고, 얼마 뒤 영중추부사로 복직된다. 둘만 아는 연극을 한 것이다. 정조는 심환지의 상소 초고를 고쳐주기까지 한다. 그 비밀편지들 속 일들은 승정원일기와도 일치한다. 정조는 심환지의 외아들이 거듭 과거에 낙방하자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켜주겠다고 위로하고 인삼과 표범가죽을 하사하는 등 서로 다정하다. 역사학계가 충격에 휩싸인 것은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영화와 소설에서 다뤄질 만큼 그 적대성이 상식화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엔한국위원회 중화민국 대표 유어만(劉馭萬) 공사는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한다. 그는 백범이 부통령이 되어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을 돕길 바란다는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권유를 내비쳤지만, 거절당한다. 백범이 밝힌 이유는 이렇다. 나는 얼마 전 평양 남북한 지도자회의에 참석했을 때 이미 완벽한 국가체제를 갖춘 북한의 엄청난 인민군 열병식을 보았다. 그런 병력과 무기를 가진 현대군대가 밀고 내려올 텐데 남쪽에 국가를 만들어봤자 곧 파괴될 뿐이다. 이게 ‘유어만 보고서’다. 이 영문보고서의 발견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김구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 양쪽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게 해준다. 백범은 두려워했고, 우남은 싸우려했던 것이다.

1994년 6월 2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소련 외무부와 북한 외무성 대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록 등 300여 종의 6·25전쟁 관련 극비문서들이었다. 이른바 ‘옐친문서’다. <김영삼 회고록>에는 ‘옐친문서로 인해 6·25전쟁의 북침설, 남침유도설, 내전설, 냉전 원인설 등 수정주의가 허구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적혀 있다. 사실이다.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김일성에게 전한다. ‘네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전쟁을 돕겠다.’

1950년 3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두 번째 방문하자 스탈린은 전쟁을 최종 허가한다. 6·25전쟁은 김일성이 제안 실행하고, 스탈린이 기획 허가하고, 마오쩌둥이 동의 지원한 ‘공산주의침략전쟁’이다. 남한은 북침은커녕 전쟁능력이 없었으며 미국은 한반도를 방어선에서 제외시켰다. 스탈린은 체코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1950년 8월 27일자 편지에서 미국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힘을 소진케 하기 위해,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유엔군 파병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속삭인다.

6·25전쟁은 냉전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라, 냉전이 6·25로 인해 본격화된 것이다. 결정적 증거들이 나오면 역사는 재구성된다. 그런데도 저 교수처럼 아직도 <한국전쟁의 기원>을 사이비 교주가 성경 끼고 다니듯 한다. 저러면 김일성과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면죄부를 받기 때문일까. ‘386지식인’들은 존재가 ‘가짜뉴스’다. 내 서가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뽑아 훑어본다. 지나간 내 청춘은 후회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제라도 안 할 수 있는 것은 안 하려 한다. 그중에 하나가 엉터리 역사의 멍청한 추종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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