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지정학에 무지한 나라의 미래

입력 2023-10-12 18:10   수정 2023-10-13 00:23

한국이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에서 약 15%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게 된 건 두 가지 덕분으로 축약할 수 있다. 삼성전자라는 기업과 글로벌 지정학이 만든 천운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1990년대는 세계화가 대세였다.

‘반도체 원조국’인 미국의 정부·기업은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설계에 집중하고, 제조는 아시아로 넘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사회주의의 맹주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려면 인근 아시아 국가들이 건실해야 했다.
삼성이 소니를 이기지 못했더라면
반도체에 이어 한국의 ‘수출 효자’로 부상한 전기차용 2차전지(배터리)산업도 정보기술(IT) 분야에서의 성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휴대폰 제조에서 쌓은 경험은 안 터지고 오래가는 배터리에 관한 거대한 임상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초반으로 기간을 넓혀 잡으면 지정학의 변화가 만들어낸 행운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배터리의 원조는 반도체처럼 미국이었다. 중동전쟁발(發) 1차 ‘오일 쇼크’로 인해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차세대 에너지원에 목맸다.

그때 등장한 것이 스탠리 휘팅엄 뉴욕주립대 교수 등이 발명한 리튬이온전지다. 이 연구를 기반으로 엑슨모빌이 1976년 세계 첫 2차전지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 꽃 필 것 같았던 2차전지는 기름값이 안정되면서 뒷방 기술로 팽개쳐지고 만다.

북미가 놓친 기회는 일본이 잡을 뻔했다. 주인공은 소니다. ‘워크맨’이라는 혁신적인 상품에 소니는 최신형 리튬이온전지를 탑재했다. 양산에 성공한 해가 1991년이다. 휘팅엄 교수와 함께 리튬이온전지 발명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3명 중 1명이 요시노 아키라 메이조대 교수다.

당시 소니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는 일본 극우주의자 이시하라 신타로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내놓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국격에 맞는 싱크탱크 있어야
만일 삼성이 소니를 반도체에서 이기지 못했더라면 현재 한국의 배터리산업이 이 정도의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소니가 몰락하면서 일본 내 배터리 공급망도 무너졌다. 그 반사이득을 LG화학, 삼성SDI, 에코프로 등이 얻었다.

세계화가 사실상 종말을 고하면서 지정학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백악관 인근의 크고 작은 수십 개 싱크탱크는 경제 안보와 관련한 수많은 의제로 끝장 토론을 벌인다. 예컨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TSMC의 2만여 명 인력을 어떻게 데려올 것인가’ 류의 질문이다. 실제 미국은 TSMC 직원의 가족까지 데려올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빅테크 임원 등이 포함된 이들 싱크탱크의 목표는 단 하나다. 백악관의 질문에 즉답을 내놓는 것이다.

우리의 사정은 미국의 먼발치에도 못 미칠 정도로 열악하다. ‘선진국 한국’이란 국격에 맞는 제대로 된 싱크탱크라고 할 만한 곳이 없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이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지난해 출범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다.

교수 등 연구원 중심의 조직이라는 점도 한계다. 한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지정학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다. 과거의 천운이 미래엔 저주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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