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지고지순한 사랑엔 용기가 필요하다

입력 2023-10-27 18:12   수정 2023-10-28 00:03

그를 본 이후로/ 난 마치 눈이 먼 것 같아/내가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오직 그 사람만 보이네/깨어 있는 꿈처럼/ 그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저 깊은 어둠 속에서/ 밝은 빛으로 떠오르네.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의 첫 구절이다. 여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한참 어릴 것 같은 어린 소녀의 감수성이 살아 있는 이 연가곡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시에 슈만이 곡을 붙였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도 클라라와 결혼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난 뒤 이틀 만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슈만은 결혼을 반대하는 클라라 아버지를 상대로 3년여의 긴 법정 소송을 했다).

오직 남편만을 숭배하며, 오직 그를 위해 살겠다는 지고지순한 여인의 모습을 남성 시인, 그리고 슈만이 작곡했다는 것이 아이로니컬하다. 어쩌면 그들은 몹시 가부장적인 남편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자신같이 미천한 여인을 그렇게 위대하고 멋진 남자가 사랑할 리 없다며 그저 기도로 그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믿을 수 없다며 기쁨의 눈물 속에서 행복한 죽음을 음미하겠다는 내용의 1번부터 3번까지의 시. 그걸 읽고 있노라면, 하루에도 열두 번 이상 바뀌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어지는 4번 곡 ‘그대 내 손에 끼인 반지여’는 프러포즈 링을 가슴에 품고 평생 그를 위해 살며 그의 영광 안에서 빛나는 자신을 찾겠다고 경건하게 다짐하는 노래다. 이전 세 곡과는 확연히 다른 차분함과 성숙함이 느껴진다. 결혼식 장면을 그린 5번 곡에서는 분주한 결혼식장의 모습과 들뜬 화자의 심리가 빠른 템포와 함께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버진 로드를 걸으며 친구들의 축하 속에 눈물을 감추는 모습과 후주로 이어지는 결혼 행진곡은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는 기쁨과 또 다른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짐으로 슬픈 마음이 공존하는 순간을 잘 나타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복한 결혼 생활. 사랑하는 이와 미래를 꿈꾸며 그를 닮은 아이를 안고 기뻐하는 이런 기쁨은 ‘오직 여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남자들은 안타깝다고 말한다.

마지막 8번 곡 ‘이제야 당신은 내게 처음으로 고통을 주시네요’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피아노의 첫 음이 죽음을 알린다. 잠자는 듯 딱딱하게 굳어버린 남편을 마주하며 자신의 세상이 사라졌음을 레치타티보와 같이 읊조리듯 노래한다. 그리고 다시 1번 곡 ‘그대를 본 이후로 난 눈이 먼 것 같아요’의 선율이 사랑하는 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후주로 연주되며 여인의 모노드라마가 끝을 맺는다.

샤미소의 시에는 8번에 이어 할머니가 된 여인이 손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가 있다고 하나 슈만은 그 시에는 작곡하지 않았다. 여성의 권위가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진 데다 비혼주의, 딩크족, 저출산 등의 이야기가 사회적 이슈가 된 오늘날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슈만의 음악적 드라마로 인해 여전히 고개가 끄덕여지고 뭉클한 공감을 끌어낸다.

남녀의 성별을 떠나 인생에 한 번쯤 사랑하는 이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순종을 한다는 건 시대를 막론하고 아름다운 용기가 아닐까. 뜨거웠던 더위가 가시고, 계절의 변화가 하루가 다르게 코끝으로 느껴지는 요즘 더 어울리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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