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디자인하우스 기업들이 해외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를 공략해 매출원을 다변화하겠다는 포석이다.
최근 다양한 형태의 드로잉이 쏟아지고 있는 데다 AI 반도체의 설계 난도가 높아지면서 대형 재봉소(TSMC, 삼성전자)일수록 처리할 일감 작업이 세분화됐다. 파운드리는 자신들이 다 커버하지 못하는 중소형 팹리스 고객의 영업을 디자인하우스에 맡겨 제작에만 집중하려는 추세다. 디자인하우스 역량이 반도체 품질과 매출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는 팹리스 시장이 협소하다. 디자인하우스가 덩치를 키우려면 해외 진출이 필수다. 에이디테크놀로지는 올해가 미국 진출 성과를 거두는 원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7월 실리콘밸리에 세운 미국 법인은 조만간 수주 소식을 전할 것이라는 게 회사 관계자 설명이다. 이 회사는 미국 외에도 2018년 베트남 호찌민, 2022년 독일 뮌헨에 법인을 세웠다. 이 회사 관계자는 "팹리스 천국인 미국을 비롯해 해외 시장을 공략하면 디자인하우스와 삼성전자가 함께 윈윈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DSP인 가온칩스는 일본에 공을 들이고 있다. 2022년 일본에 법인을 세운 가온칩스는 지난 2월 도멘디바이스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도멘디바이스는 매년 3조~4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일본 최대 반도체 상사로, 삼성전자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와 전자부품을 유통한다.
두 회사는 일본에서의 점유율 확대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일본은 소니, 파나소닉, 르네사스 등 팹리스는 탄탄하지만 디자인하우스 개념이 제한적이다. 이 밖에 세미파이브, 코아시아 등의 DSP가 미국, 인도 등에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TSMC의 국내 유일 디자인하우스인 에이직랜드도 해외 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첫 진출 국가로 글로벌 팹리스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미국을 점찍었다. 사전 준비 작업으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합작법인 '오하나'를 설립했다. 에이직랜드는 지난달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해외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첫 기업설명회(IR)를 가졌다.
반도체 설계 시도는 많지만 이를 생산할 창구가 없어 국내 디자인하우스가 중국에 진출할 경우 현지 개발 수요를 국내 생산으로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디자인하우스가 중국 진출을 준비하는 이유는 잠재 고객이 많기 때문"이라며 "삼성 파운드리 수요 확대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도 디자인하우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내 시스템반도체 기업의 미국 진출을 위한 R&BD(연구·사업개발) 센터 신설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사업은 국내 디자인하우스가 미국 및 중국의 시스템반도체 R&D 수요를 발굴하고, 시장에 원활히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센터는 입주 기업에 현지 마케팅을 위한 네트워크 강화, 기술 동향 파악과 법률 자문 등의 지원을 펼친다. 해당 센터는 중국 심천, 상해 지역에서 이미 운영되고 있으며, 미국 내에는 처음으로 설립될 예정이다. 박준규 에이디테크놀로지 대표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 큰 곳으로 가야 디자인하우스가 성장한다"고 밝혔다.
한국산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글로벌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는 593조원이다. 한국은 20조원으로 점유율이 3.3%에 불과하다. 미국은 323조원으로 54.5%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유럽(70조원·11.8%) 대만(61조원·10.3%) 일본(55조원·9.2%) 중국(39조원·6.5%) 순이다. 김용석 성균관대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는 "빅테크들의 자체 칩 개발 수요가 늘고 AI 반도체가 확산하면서, 중간에서 설계 철학을 조율해줄 디자인하우스의 위상은 더 높아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가 부상한 점도 디자인하우스의 해외 진출을 촉발하고 있다"며 "AI 반도체 설계가 워낙 복잡한 탓에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설계 커뮤니케이션 간극을 좁혀줄 디자인하우스의 역할은 점점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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