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트럼프의 한 방 “바보야, 문제는 물가야” [트럼프 스톰①]

입력 2024-11-09 08:08   수정 2024-11-09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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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트럼프 스톰]


슈퍼맨은 1938년 미국에서 등장했다. 대공황의 막바지, 실업률은 19%에 이르렀다. 모든 콘텐츠에는 동시대인들의 욕망이 담겨 있다. 슈퍼맨에는 경제공황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의 심정이 투사돼 있다. 가상의 영웅을 보며 억눌린 욕구를 해소했고 상처 입은 자존심도 회복했다. 슈퍼맨은 세계를 지키는 영웅, 미국의 상징이었다.

도널드 트럼프를 다시 백악관으로 불러들인 미국인들의 마인드에는 슈퍼맨과 같은 영웅의 코드가 담겨 있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은 그 상징이다. 고물가, 마약, 난민, 양극화 등 미국의 문제를 통째로 해결해줄 영웅을 바라는 심리였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스트롱맨을 고용했다”고 표현했다.

슈퍼맨과 다른 건,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동맹, 환경, 공존 등의 가치는 관심사가 아니다. 전 세계는 돌아온 트럼프가 몰고 올 강력한 폭풍에 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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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문제가 트럼프를 다시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과거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으로 미국 대통령에 오른 것처럼 이번에도 경제는 선거의 화두였다.

2024년 트럼프와 해리스의 당락을 결정지은 문제 또한 도덕적인 가치보다 내 삶을 개선해줄 눈앞의 경제 문제였다. “4년 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졌다”고 답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차기 대통령은 민주당의 경쟁 관계인 공화당 후보 트럼프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계층과 유색인종 등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 일부가 트럼프에 표를 던졌다.

아웃사이더를 표방한 그의 당선에 ‘워싱턴의 정치적 엘리트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는 노동자를 대변하는 지도자의 이미지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며 다시 세계의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 78세 챔피언의 귀환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돌아왔다.

트럼프는 11월 5일(현지 시간) 치러진 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4년 만에 백악관에 재입성하게 됐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트럼프와 부통령 후보인 JD 밴스 상원의원은 미 동부시간
7일 오전 2시 기준으로 전체 선거인단 총 538명 중 과반인 295명을 확보했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카멀라 해리스와 부통령-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는 226명 에 그쳐 트럼프의 승리가 확실시됐다.

트럼프는 대선의 승부를 좌우하는 7대 경합주 가운데 펜실베이니아(선거인단 19명)와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이상 선거인단 16명), 위스콘신(선거인단 10명), 미시간(선거인단 15명), 애리조나(선거인단 11명), 네바다(선거인단 6명) 등에서 모두 전승했다.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와 해리스는 마지막까지 초박빙의 승부를 예고했다. 해리스가 4%포인트 차로 이긴다는 출구 결과까지 나왔다. 그러나 ‘선거는 이성적 행위가 아니다’라는 뇌과학자들의 말처럼 여론조사에서 잡히지 않았던 ‘샤이 트럼프’ 유권자의 존재가 이번에도 위력을 과시했다. 이날 승기를 쥔 트럼프는 자택이 있는 플로리다 팜비치 컨벤션센터에 집결한 지지자들 앞에서 “미국 국민을 위한 장대한 승리이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게 해줄 것”이라며 “미국의 진정한 황금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 트럼프 소환한 물가
4년 전 백악관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장했던 트럼프를 다시 불러들인 건 ‘물가’였다. 미국 여론조사업체인 에디슨리서치의 출구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45%는 현재 자신의 재정 상황이 4년 전보다 나빠졌다고 답했는데 이는 2020년 조사 당시 20%보다 2배 이상의 수치다. 이들은 해리스(17%)보다 트럼프(80%)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밑바닥 민심을 흔든 건 최근 몇 년간 이어진 높은 인플레이션 수준이었다. 절반이 넘는 유권자가 지난 1년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으며 4명 중 1명은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고 밝혔다. 중간 정도의 어려움을 겪은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약간 더 지지했으며(50% 대 47%), 심각한 고통을 느낀 유권자 중 73%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물가 안정은 바이든 정부의 핵심 과제였다. 2023년 6월엔 물가 둔화에 바이든 행정부의 계획이 효과를 내고 있다고 자평했다. 경제지표는 실제 그의 말대로였다. 지난 8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2.5%로 3년 반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인플레이션이 Fed 목표에 매우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9월 역사적인 금리인하가 시작됐다. 2022년 3월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이후 30개월 만이자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대응을 위해 긴급히 금리를 낮췄던 2020년 3월 이후 4년 반 만의 금리인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Fed의 대응이 너무 늦었던 것일까. 유권자들이 바이든 정권 동안 느낀 체감 물가는 실제 지표와는 큰 괴리가 있었다. 미시간대가 월 2회 발표하는 소비자심리지수는 2022년 6월에 역대 최저치인 50.0을 기록했다. 이 수치가 낮을수록 향후 소비를 줄이겠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Fed의 공격적인 물가 전쟁으로 경제 심리가 개선됐지만 이는 트럼프의 첫 임기였던 2017~2021년(평균 소비자심리지수 90대)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차라리 트럼프가 더 낫다는 경험이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한인 3세 마리아 김(37) 씨는 이번 선거 결과가 자명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외식 한 끼는 꿈꿀 수조차 없고 고공상승한 생활물가에 좀도둑이 득실거리는 슈퍼마켓, 샴푸 같은 소모품을 사는 것조차 직원을 불러 자물쇠를 따야 할 정도로 열악해진 치안. 마리아 씨는 “평범한 미국 사람들의 일상이 최악으로 치달았다”며 “그게 바로 바이든 시기였다”고 말했다.
# “끔찍한, 최악의” 4년
한국에도 미국 물가의 악명이 전해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충격적인 미국 물가”, “연봉 1억원도 살기 힘들다는 미국 물가”, “미국 물가 체험해보니….” 등 미국 물가를 주제로 한 콘텐츠가 올라 왔다. 떴다 하면 조회수를 보장할 만큼 충격적인 영수증이 쏟아졌다.

대표적 서민 브랜드인 맥도날드의 패스트푸드 가격은 지난 3월 기준으로 2019년보다 33% 상승했다.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미국 소비자들은 일상적으로 이용하던 식음료에서 가격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으며 일부 소비자는 소비 한계에 도달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졌다. 올해 1분기(1~3월) 미국의 패스트푸드 이용객은 전년 대비 3.5% 감소했으며 스타벅스의 미국 매장 방문객 수도 1분기 7% 감소했다.

‘엔비디아’로 대표되는 빅테크의 위상에 미국의 자본시장은 전세계 자산을 빨아들이며 고공성장했지만 서민들의 삶은 팍팍했다.

식품 물가 외에도 일반 개인이 주택을 소유하는 것은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어 현재 미국 가구의 77%는 중간 가격대의 주택을 살 여유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팬데믹으로 비용이 증가하면서 결혼식 가격은 2019년과 2020년보다 현재 최대 6배 가까이 상승했으며 더 많은 미국 성인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아이 낳기를 꺼리고 있다는 조사가 나왔다.

주거, 결혼, 출산, 양육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중산층 유권자들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지만 워싱턴은 간극을 좁히는 데 사실상 실패했다. 팬데믹 이후 미국에 쏟아진 부는 소수 상류층에 집중됐다는 것도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불평등과 양극화는 확산됐다. 정부가 발표한 고용 수치는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고 실업률은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을 기록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20~24세 실업률은 1년 전 6.3%에서 7.9%로 높아졌다.

칼럼니스트 애덤 시셀은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현 경제를 설명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한 용어가 ‘끔찍하다(horrible)’, 둘째는 ‘최악이다(It sucks)’였다”고 뉴욕타임스에 썼다. 그리고 그는 의견을 낸 모든 사람이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지지 사유는 간단했다. “지금 계란은 4년 전보다 거의 3배가 비싸졌고 자동차 대출 금리는 50% 이상 올랐으며 일부 회사는 근무 시간을 줄이고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었을 때가 가장 좋은 시기였다.”

갤럽에 따르면 미국인의 25%만이 국가의 방향에 만족했고 73%는 불만족했다. 또 다른 조사기관인 입소스에 의하면 미국인의 59%는 국가가 쇠퇴하고 있다고 말했고 60%는 “시스템이 망가졌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69%는 “정치 및 경제 엘리트는 근면한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고 63%는 “이 나라의 전문가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공감했다. 이 숫자들은 지난 4년간 바이든의 민주당이 엘리트 정당으로 인식됐고 미국의 정치적 엘리트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였다.
# 엘리트주의의 붕괴
“이번 선거는 워싱턴이 국민과 동떨어졌고 ‘깨어 있는’ 정치적 올바름에 지쳤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피터 베이커도 이러한 신호에 주목했다. 앞서 트럼프가 여러 차례 언급한 ‘미국의 정치권이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는 주장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났다는 지적이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당시부터 워싱턴의 정치 엘리트들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내세웠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선거 캠페인과 대통령 재임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2016년 10월 13일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열린 유세에서는 “워싱턴의 정치 기득권은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만을 추구한다”고 발언했다. 2017년 1월 20일 취임 연설에서도 “오늘 우리는 단순히 권력을 한 행정부에서 다른 행정부로, 또는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워싱턴DC에서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피터 베이커는 “유권자들의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양당의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더 깊고 심오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이제 정치권은 더 이상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를 ‘단순한 일탈’로 치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8년 전 우연한 승리로 백악관에 잠입한 특이한 인물이 아니라 그가 이제 미국을 자신의 이미지로 재편하는 변혁적 힘을 확립했다는 논지였다. 이는 곧 민주당이 노동자 계층과 유색인종 등 핵심 지지층의 표심을 잃으면서 트럼프의 발언이 설득력을 얻었다는 주장이었다.

민주당계 전략가들의 반성도 이어졌다. 조 맨친 상원의원의 비서실장 출신인 크리스 코피니스는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파괴하려는 당신들의 의제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문제에 집중해달라’고 4년간 비명을 질렀지만 이 나라의 엘리트들은 듣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모든 곳의 유권자와 소원해졌다”고 이번 대선을 평가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참모인 파이즈 샤키어는 “우리는 노동자 계층과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백인들에게 ‘여러분을 위한 정당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전략을 추구해왔다”고 자조했다.
# 노동자 표심 흔든 ‘MAGA’
반면 트럼프는 이 간극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바이든 행정부 동안 서민, 노동자 가정이 파탄에 빠졌다며 저소득층 유권자를 설득했다. 11월 3일 유세에선 “바이든·해리스의 4년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지옥만 안겨주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럼프는 또 불법 이민자들이 살인과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서민들의 일자리를 앗아간다며 임기 첫날 사상 최대 규모의 범죄자 추방 프로그램을 시작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는 친이민자 정책으로 임기 내 불법 이민자를 늘린 민주당과 차별화된 정책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되찾겠다’고 했다.

트럼프가 경제와 이민 문제에 집중한 사이 해리스가 선거 기간 내내 강조해 온 낙태권 보호와 민주주의 이슈는 상대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란 트럼프의 슬로건은 트럼프와 공화당을 기업의 정당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정당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일조했다.

수많은 이민자를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찾아 되돌려주는 일. 사실상 제로섬 게임의 사고방식이지만 이것이 곧 당장 먹고살기 어려운 저소득층과 노동자층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칼럼니스트 애덤 시셀은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소득뿐 아니라 자존심까지 회복시켜 주겠다는 어둡고 비이성적인 후보에게 표를 준다고 해서 탓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며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그는 “반트럼프주의자들은 대선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심판으로 보았지만 많은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이건 단순히 돈의 문제였다”고 평가했다.

엘리트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독일의 사회학자 미하엘 하르트만은 “대중과 괴리된 삶을 사는 정치 엘리트 집단은 점점 대중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자신이 내리는 결정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인식하지 못한다”며 “그 결과로 엘리트주의는 대중의 정치 혐오와 우익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의 부상을 낳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반은 흔들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앞서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7월 18일 뉴욕타임스에 “민주당이 ‘MAGA’를 이기고 싶다면 오렌지맨(트럼프)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월 6일(2021년 미국 의회의사당 습격 사건)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민주당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면 MAGA 세계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특히 노동계층 유권자에게 더 나은 것을 정중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썼다.

폴리코노미의 정점에 선 미국 대선의 결과가 발표된 지금, 세계는 다시 1992년 미 대선의 슬로건을 되새길 때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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