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단을 내려가 통로를 따라가면 돔 형태의 내부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천장의 원형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은 철로 만든 인간의 형상 일곱 개를 비춘다. 뒤쪽 반원 모양의 출구 너머로는 산자락이 배경처럼 펼쳐진다.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에 들어선 건물 ‘그라운드’. 그 속에 들어선 앤터니 곰리(72)의 작품은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드넓은 우주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럼에도 삶은 왜 아름다운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 조각가’로 불리는 곰리의 작품에는 삶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가 영국 북동부의 작은 도시 게이츠헤드에 세운 ‘북방의 천사’가 그랬다. 쇠락한 탄광촌이던 이곳에 작품이 들어서자 이를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활기를 되찾은 게이츠헤드는 문화·예술 중심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가동해 연간 685만 명(2023년 기준)이 찾는 관광 명소로 변신했다.
그런 곰리의 시선이 지금 한국에 못 박혀 있다. 올해 그는 한국에서 전시를 세 개나 선보인다. 뮤지엄산에서 지난 20일 개막한 ‘드로잉 온 스페이스’는 그 백미다. 조각과 드로잉, 설치 작품을 아우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곰리 전시. 특히 새 전시관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전시는 자연과 어우러지며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전시를 위해 방한한 곰리를 만나 작품 세계의 변화와 한국 전시에 관해 물었다.
▷인체에 천착하는 이유가 뭔가요.“1960년대부터 저는 줄곧 ‘인간의 한순간을 공간 속에서 잡아낸 결과물’을 만들어왔습니다. 이를 통해 공간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싶었어요. 인간 몸과 공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요. 처음에는 제 몸에서 직접 뜬 석고 몰드를 바탕으로 납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그 조각의 안쪽에는 빈 공간이 있어요. 제가 한때 머물던 곳이자, 한 인간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을 뜻했습니다. 하지만 작업이 점점 진화하면서 저는 관람객과 작품이 더 밀접한 관계를 맺기를 원했습니다.”
▷그라운드에 전시된 작품들은 그 결과물입니까.
“블록 모양을 쌓아 올려 인체를 표현한 건 작품에 시대를 반영하려는 시도입니다. 디지털 시대를 표현한 거죠. 이번 전시의 미술관 공간(청조갤러리)에 나온 작품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개념의 작품입니다. ‘리미널 필드’는 쇠막대나 철망 등을 사용해 더 열려 있는 구조, 추상적인 구조로 제작했어요. 관람객의 몸과 작품이 뒤섞이는 느낌을 주려고 했습니다. 관객이 안쪽에 들어가는 거대한 철선(鐵線) 형태의 ‘오르빗 필드’는 실제로 관객의 몸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 섞이게 만든 작품입니다.”
▷전시 제목인 ‘드로잉 온 스페이스’는 무슨 뜻인가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어요. 오르빗 필드처럼 공간 위에 그린(draw) 3차원 드로잉이라는 것, 그리고 공간이라는 그물이 우리를 끌어당긴다(draw)는 것. 이번 전시에 나온 곡선 조각 작품들은 안도가 설계한 미술관 안쪽의 직각 모서리와 만나 관객의 감각을 일깨웁니다. 이는 인간과 건축, 인간과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보게 만들고, 자신의 몸이 차지하는 공간을 돌아보게 합니다. 제 작품이 늘 그런 것처럼요.”
▷이번에 안도와 지은 전시관 그라운드는 어떤 공간입니까.
“안도의 작품은 인간과 빛, 땅의 관계를 오감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몸으로 건축을 느끼고, 건축으로 공간을 느낀다’는 시각을 배웠습니다. 그라운드는 그 결과물이에요. 작업을 하면서 안도와 저는 재료, 질량, 공간, 그리고 빛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곳은 밖으로 열려 있어 자연과 날씨를 그대로 받아들여요. 관객은 이곳에서 자신의 몸과 빛, 시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죠. 건축물 북쪽에 개방된 부분으로 보이는 산등성이의 윤곽은 이런 감각을 더욱 또렷하게 해줍니다.”
▷그라운드에서 관객이 무엇을 느끼기를 바라나요.
“인간은 모두 유한한 존재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라운드는 그 감각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돕죠. 제가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배운 불교의 명상법처럼요. 불교의 명상은 몸의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한 상태로 만드는 단계부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들숨과 날숨,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움직임 같은 자연의 리듬을 훨씬 더 가깝게 느끼게 되죠. 그 상태에서 작품을 보면 공간과 몸, 시간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예술에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연기(緣起) 사상, 우주 만물은 영원히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 담겨 있습니다.
“제 작품 주제인 몸과 공간은 인간 삶을 구성하는 근원입니다. 몸이 없다면 삶은 존재하지 않아요. 공간이 없다면 우리가 움직이고 나아갈 자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137억 년 전 시작된 질량과 에너지의 끊임없는 교환 과정, 그 영원 속에 존재하는 찰나의 형태일 뿐이죠. 제 작업은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는 하나의 장(場)입니다. 우리 몸과 존재의 유한함을 다시 바라보고 이를 통해 자연, 우주, 에너지, 시간과 같은 더 큰 것들을 성찰하는 실험장.”

▷뮤지엄산이라는 공간은 이런 주제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곳인가요.
“예술과 자연을 나란히 바라보며 사유할 수 있는 특별한 곳입니다. 그 덕분에 관객은 이곳에서 예술이 더 넓은 차원과 통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잘 깨닫게 될 겁니다.”
▷당신은 조각가이지만 이번 전시에는 드로잉 작품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저는 매일 드로잉 작업을 합니다. 드로잉은 생각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에요. 뇌파처럼 우리 존재의 흔적을 옮기는 행동일 수도, 그저 놀이일 수도 있으며, 단순히 선을 긋는 행위이기도 하죠. 최초의 예술도 구석기인이 세계 곳곳의 동굴 벽에 그린 그림이었잖아요. 예술은 거기서 비롯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에 나온 드로잉은 제 삶의 기록이자 예술의 출발점입니다.”
▷어떻게 봐야 전시를 잘 감상할 수 있을까요.
“생각은 잠시 접고 당신이 마주하는 작품과 그 순간을 오롯이 느껴보세요. 작품은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쇠는 쇠고, 알루미늄은 알루미늄이며, 잉크는 잉크일 뿐이죠. 이 물질들은 당신을 포함한 주변 모든 요소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합니다. 예술은 바로 그 관계를 깨닫는 순간에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곰리의 작품 세계와 인터뷰 전문은 ‘아르떼’ 매거진 7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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