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화제를 모은 드라마 '정년이'부터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와 '미지의 서울'까지. 최근 인기를 끈 콘텐츠의 중심에는 '여성 서사'가 자리 잡고 있다.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은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고, 이에 공감하는 사람 역시 많다는 방증일 테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누하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극단 북새통의 남인우(50) 예술감독 겸 연출은 이보다 앞서 여성 서사가 두드러진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데뷔작인 '가믄장아기'(2004년)부터 소리꾼 이자람과 함께한 '사천가'(2007년)와 '억척가'(2011년)를 비롯해 웹툰의 창극화로 주목받은 '정년이'(2023년)까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동시대 여성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왔다.
다음 달 6일 한국경제신문이 주최하는 아르떼 살롱 '아티스트 토크'의 연사로 나서는 그는 여성 연출로서 겪은 우여곡절과 인공지능(AI) 시대 공연 연출가가 갖춰야 할 자질, 예술교육의 가치 등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아티스트 토크를 한 달 앞두고 그를 만나 연출가로 살아온 20년 여정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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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연출이 처음 연극에 호기심을 품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경기도 평택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탈출구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길뿐이라고 여긴 그는 부족한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어 든 영어 책에서 연극의 매력을 느끼게 됐다. 지금도 연극 무대로 자주 올라오는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남 연출은 "문학 수업시간에 읽은 희곡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보고, '이런 게 연극이라면 꼭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그 길로 연극반을 만들고 난생 처음 연극이라는 것을 무대에 올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장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버지가 '우리 집안에 딴따라는 안 된다'며 제 교복을 빡빡 찢어버렸어요. 사실 처음에는 연극에 대한 호기심 정도였는데,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시는 걸 보니까 오히려 정말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남 연출은 끝내 아버지 허락을 받고 한양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시절엔 연극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방황하던 그는 졸업 후 연극 무대가 아닌 미디어 관련 회사에서 잠시 일했다. 그러다 세상을 향한 자신만의 '질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연출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데뷔작은 제주민요를 곁들인 제주설화 바탕의 마당극 '가믄장아기'다. '가믄장아기'는 여성의 주체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독일, 멕시코, 호주 등 세계 각국에 초청되며 큰 주목을 받았다. "남자와 여자의 젠더 구분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여기선 여자가 남자한테 프로포즈도 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그려 나가요."
이어 남 연출은 "판소리가 민중의 서사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전통예술이라는 장르는 오늘날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며 "전통예술의 양식과 현대적 질문을 접목하는 작업을 통해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 연출은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부조리를 비판한 판소리 '사천가',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각색한 창극 '내 이름은 오동구' 등에서도 전통예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담아냈다.
영화 한 편도 AI가 눈 깜짝할 사이 만들어 놓는 시대, 앞으로 공연예술 연출가는 어떤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할 수 있을까. 그는 "AI는 축적된 데이터 속에서 답을 뽑아내지만, 인간 연출가는 그 데이터 이면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다"며 "연출은 산만하게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갖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의 알고리즘 속에서는 같은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에코 챔버(확증 편향)' 현상이 강해져요. 그 메아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고, 연출이 해야 하는 일이죠. 메아리 속에 머무는 게 아니라, 메아리 밖으로 나올 수 있게 관점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남 연출은 여성, 장애인 등 흔히 '비주류'로 분류되는 것들에 특히 눈길이 간다. 빅데이터 기반의 AI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이야기다. "퀴어(queer)한 존재에 관심이 많아요. 이상하고 오묘한 사람들요. 신경다양성(자폐, ADHD, 지적장애 등 뇌신경 차이를 장애가 아닌 다양성으로 포용하는 용어) 어린이, 노인 등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을 들여다보는 데서 재미와 의미를 느껴요." 남 연출은 현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중점 사업인 '꿈의 극단'을 통해 신경다양성 어린이와 비장애인 어린이가 함께 공연을 만드는 수업을 맡고 있다.
그는 여성 예술가 간 연대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2018년 연극계 미투 사건 이후 자정 작용이 일어나긴 했지만,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유리천장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미투 사건 이후 연극계가 건강해졌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지금도 피라미드 안에서 여성 연출가나 예술가들이 생존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에요.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정책기관에 진출한 문화계 여성 인력만 봐도 유리천장이 여전히 공고하다는 걸 알 수 있죠." 여성 연출가로서 온갖 어려움을 겪어온 그의 말에서 후배 여성 예술인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남 연출은 예술교육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예술교육이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다. "저는 여러모로 화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대학원 연극 수업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 제 자신이 변하기 시작했죠.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며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연극이 가르쳐줬어요. 연극, 그리고 예술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세민 기자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누하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극단 북새통의 남인우(50) 예술감독 겸 연출은 이보다 앞서 여성 서사가 두드러진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데뷔작인 '가믄장아기'(2004년)부터 소리꾼 이자람과 함께한 '사천가'(2007년)와 '억척가'(2011년)를 비롯해 웹툰의 창극화로 주목받은 '정년이'(2023년)까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동시대 여성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왔다.
다음 달 6일 한국경제신문이 주최하는 아르떼 살롱 '아티스트 토크'의 연사로 나서는 그는 여성 연출로서 겪은 우여곡절과 인공지능(AI) 시대 공연 연출가가 갖춰야 할 자질, 예술교육의 가치 등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아티스트 토크를 한 달 앞두고 그를 만나 연출가로 살아온 20년 여정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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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연출이 처음 연극에 호기심을 품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경기도 평택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탈출구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길뿐이라고 여긴 그는 부족한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어 든 영어 책에서 연극의 매력을 느끼게 됐다. 지금도 연극 무대로 자주 올라오는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남 연출은 "문학 수업시간에 읽은 희곡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보고, '이런 게 연극이라면 꼭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그 길로 연극반을 만들고 난생 처음 연극이라는 것을 무대에 올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장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버지가 '우리 집안에 딴따라는 안 된다'며 제 교복을 빡빡 찢어버렸어요. 사실 처음에는 연극에 대한 호기심 정도였는데,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시는 걸 보니까 오히려 정말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남 연출은 끝내 아버지 허락을 받고 한양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시절엔 연극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방황하던 그는 졸업 후 연극 무대가 아닌 미디어 관련 회사에서 잠시 일했다. 그러다 세상을 향한 자신만의 '질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연출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데뷔작은 제주민요를 곁들인 제주설화 바탕의 마당극 '가믄장아기'다. '가믄장아기'는 여성의 주체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독일, 멕시코, 호주 등 세계 각국에 초청되며 큰 주목을 받았다. "남자와 여자의 젠더 구분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여기선 여자가 남자한테 프로포즈도 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그려 나가요."
이어 남 연출은 "판소리가 민중의 서사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전통예술이라는 장르는 오늘날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며 "전통예술의 양식과 현대적 질문을 접목하는 작업을 통해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 연출은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부조리를 비판한 판소리 '사천가',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각색한 창극 '내 이름은 오동구' 등에서도 전통예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담아냈다.
영화 한 편도 AI가 눈 깜짝할 사이 만들어 놓는 시대, 앞으로 공연예술 연출가는 어떤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할 수 있을까. 그는 "AI는 축적된 데이터 속에서 답을 뽑아내지만, 인간 연출가는 그 데이터 이면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다"며 "연출은 산만하게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갖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의 알고리즘 속에서는 같은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에코 챔버(확증 편향)' 현상이 강해져요. 그 메아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고, 연출이 해야 하는 일이죠. 메아리 속에 머무는 게 아니라, 메아리 밖으로 나올 수 있게 관점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남 연출은 여성, 장애인 등 흔히 '비주류'로 분류되는 것들에 특히 눈길이 간다. 빅데이터 기반의 AI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이야기다. "퀴어(queer)한 존재에 관심이 많아요. 이상하고 오묘한 사람들요. 신경다양성(자폐, ADHD, 지적장애 등 뇌신경 차이를 장애가 아닌 다양성으로 포용하는 용어) 어린이, 노인 등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을 들여다보는 데서 재미와 의미를 느껴요." 남 연출은 현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중점 사업인 '꿈의 극단'을 통해 신경다양성 어린이와 비장애인 어린이가 함께 공연을 만드는 수업을 맡고 있다.
그는 여성 예술가 간 연대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2018년 연극계 미투 사건 이후 자정 작용이 일어나긴 했지만,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유리천장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미투 사건 이후 연극계가 건강해졌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지금도 피라미드 안에서 여성 연출가나 예술가들이 생존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에요.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정책기관에 진출한 문화계 여성 인력만 봐도 유리천장이 여전히 공고하다는 걸 알 수 있죠." 여성 연출가로서 온갖 어려움을 겪어온 그의 말에서 후배 여성 예술인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남 연출은 예술교육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예술교육이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다. "저는 여러모로 화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대학원 연극 수업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 제 자신이 변하기 시작했죠.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며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연극이 가르쳐줬어요. 연극, 그리고 예술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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