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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시간 여행, 경성역에 피어난 50개의 낙원

입력 2025-07-17 16:41   수정 2025-07-18 02:47

100년 전 경성역은 모더니즘의 중심이었다. 돔 형태 지붕, 붉은 벽돌, 화강암 바닥 등 외관은 물론이고 서양식 레스토랑과 카페가 잘 차려입은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모여들게 했다. 경성역은 단순한 교통 시설을 넘어 당대 문화 활동의 중심지였다. ‘문화역서울284’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지금도 이곳은 문화예술 거점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올해로 개장 100주년을 맞이한 문화역서울284에서 다양한 미술 장르를 한자리에서 만나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난 6월 13일 시작한 ‘우리들의 낙원’ 전시다. 낙원을 주제로 한국 현대 미술 회화 작품과 사진, 조각, 대규모 설치 작업, 가상현실(VR), 미디어 아트 등 최첨단 기술 기반의 융합예술 작품이 모였다. 작가 21명의 작품 50여 점을 통해 행복과 이상향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목격할 수 있다.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곳에서 진행되는 전시인 만큼 각 작품이 설치된 장소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감상의 깊이가 더해진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최진희 전시예술감독은 “작품을 배치할 때 최우선으로 둔 것은 제작 연도 같은 순차적 기준이 아니라 문화역서울284의 각 장소와 작품이 얼마나 어우러지는지였다”며 “귀빈실, 대합실 등 특별한 기능을 하던 방들이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적 여행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강내산·VR 끼고 가상 세계로


무엇이든 단순히 보는 것보다 경험하는 것이 더 짙은 여운을 남기는 법. 이번 전시에는 관람객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 눈에 띈다. 1층 중앙홀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작품은 몰입형 미디어 아트 ‘금강내산: 허(虛)와 실(實)의 조화’.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담긴 철학과 풍경을 최첨단 컴퓨터그래픽이미지(CGI) 기술로 재해석한 ‘금강내산’과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영상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실감 나게 재현된다. 황세진(스튜디오 레논) 작가가 간송미술관과 협업해 작품을 완성했다.

전시장에서 보기 힘든 생경한 풍경이 펼쳐지는 장소도 있다. VR 체험이 이뤄지는 부인대합실이다. 1, 2등 대합실을 이용하는 여성 손님을 위해 별도로 마련한 이 공간은 디지털 데이터 세상으로 변모한다. VR 디바이스를 착용한 관람객은 무언가를 향해 손짓하거나 박수 치며 가상 세계로 접속한다. 이상욱 작가가 VR, 3차원(3D) 시뮬레이션, 디지털 드로잉 등 디지털 매체로 구현한 ‘하이브리드 스페이스 시리즈: 버추얼 데이터베이스 파빌리온’이다. 기기를 착용하면 캄캄한 우주 한복판에 떨어진 듯 끝없이 이어진 바닥과 천장의 공간감에 잠시 아찔하다. 곧 지하철을 재현해놓은 가상 세계에 금세 빠져든다.
귀빈실에 퍼지는 청명한 목탁 소리?

빨간색 벨벳 커튼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벽난로, 고급 벽지로 장식된 귀빈실은 국가 귀빈들이 주로 사용하던 공간. 이 방 한가운데에서는 원형의 키네틱 아트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가 느릿느릿 움직이며 소리를 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모터에 의해 플라스틱 병과 나무 조각이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마치 목탁 두드리는 소리처럼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 작품은 양정욱 작가의 경험을 담고 있다.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졸고 있는 경비원 모습을 관찰하던 게 출발점이었다고. 작품 가운데 희미한 전구 빛이 마치 새벽녘의 동틀 무렵을 표현한 듯하다. 고단한 노동 풍경을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전시는 후반부로 갈수록 보다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작품으로 펼쳐진다. 정연두 작가의 2011년 작품 ‘남서울 무지개’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실제 거주하는 30여 가구의 일상 공간을 정면으로 포착한 사진 연작이다. 아파트라는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빛깔로 펼쳐지는 삶의 단편을 직관적인 시선으로 풀어낸다.

‘투-욱’. 일정하게 들리는 스위치 꺼지는 소리가 1층 3등 대합실을 가득 메운다. 3등석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대기하던 이 장소는 대합실 중 가장 넓어 소리가 더 분명하게 울려 퍼진다. 소리를 따라 다다른 곳은 이창훈 작가의 작품 앞. 전구를 활용해 낙원의 의미를 시각장애인용 점자로 표현한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장성욱 선임큐레이터는 “일반인은 점자를 몰라 이해할 수 없고, 시각장애인은 높이 설치된 작품이라 만질 수 없으니 가까이에 있어도 이해할 수 없는 낙원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점등된 점자 앞엔 종이 박스로 지은 거대한 집이 놓여 있다. 이원호 작가가 한국과 일본 노숙인에게 그들이 집처럼 사용하는 종이 박스를 구입한 후 그 상자들로 지은 집이다. ‘부(浮)부동산’(2015)은 작가가 실제 노숙인을 찾아가 흥정한 뒤 매매하는 과정을 영상, 서명이 날인된 매매 계약서와 함께 전시해 현실감을 더한다. 언제부터인가 재산으로서 의미가 더 커져버린 집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하태범, 황인기, 구성연, 듀킴, 노진아, 이상욱 등 작가 21명이 작품으로 표현한 낙원을 감상할 수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전시는 7월 27일까지다.

강은영 기자 qboom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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