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한국의 놀라운 사회 이동성을 보여줍니다. K팝과 K뷰티의 성공도 포용적 경제 제도의 산물이죠.”
작년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해리스공공정책대학원 석좌교수는 1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의 발전은 ‘포용적’(inclusive) 경제 제도를 택한 덕분에 가능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포용적 제도란 더 많은 사람을 경제활동에 참여시키는 체제를 말한다. 혁신과 창의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 다양한 사람이 이익을 가져갈 수 있다. 특정 권력 집단이 이익을 독점하는 ‘착취적’(extractive) 제도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로빈슨 교수는 북한은 착취적 제도를 취했기 때문에 한국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18일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학자대회 참석차 방한했다.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에서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뤄낸 비결은 무엇입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기 한국은 정치적으로 착취적이었지만 경제 제도는 상당히 포용적이었습니다. 정주영 전 회장의 일대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정 전 회장의 자서전을 읽었는데, 놀라운 사회적 상향 이동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는 사람도, 진입장벽을 세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독재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그가 국가 발전에 집착했기 때문에 포용적 경제 제도와의 조합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이 시작한 경제 발전은 한국이 민주주의로 전환하지 않았다면 계속되지 못했을 겁니다. 정치적 포용으로의 전환이 지금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사회를 만들어냈죠. 스마트폰, 자동차뿐 아니라 K팝, K드라마, K뷰티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한국이 빠른 경제성장은 이뤘지만 불평등이 심화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데이터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계은행(WB)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 불평등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지난 10년간 오히려 완화됐습니다. 불평등의 심화 없이 경제 변혁을 달성했다는 얘기입니다.”
▷의·정갈등, 연금개혁 등 정치·경제적 갈등이 심각합니다.
“사회에는 항상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합니다. 경험적으로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 체제보다 이런 갈등을 바람직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데 유리합니다. 모든 주장이 공개되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자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지지를 얻어야 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줄여야 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포용적 제도가 후퇴하고 있다고 봅니까.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유권자층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에는 분명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경제 정책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경 통제나 관세 정책이 그 자체로 비포용적인 제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억해야 할 점은 대부분 미국인이 지난 수십 년간의 세계화 흐름에서 혜택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인 입장에서는 세계화가 후퇴하는 것에 대해 ‘착취적’이라고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 등은 관세를 낮추는 대가로 대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약속했습니다.
“현재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은 자유무역 기조와 맞지 않습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럴 때 주요 경제국의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미국 없이 무역 체제를 스스로 조직하거나, 혹은 미국 상황에 맞게 체제를 조정하려는 접근이 있을 겁니다. 한국과 일본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미·중이 전쟁을 벌일 위험이 크다고 보지 않습니다. 1970년대 냉전 절정기와 비교하면 지금 세계는 훨씬 안전합니다. 다만 미·중은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미국의 대(對)중국 정책은 ‘경제성장이 중국을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로 변모시킬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기반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다른 나라 정치에 개입하거나 ‘정권 교체’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후 이란을 폭격했지만요.) 그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오히려 중국과 더 나은 관계를 구축하는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양국이 서로의 정치 체제가 나름의 정당성을 지녔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도 노벨경제학상이 나올까요.
“서구 경제학자가 노벨상을 독점하는 이유는 ‘대분기’(great divergence) 때문입니다. 경제성장이 서구에서 시작됐고 이것이 지식 축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나 동아시아에서 노벨상이 늦게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앞으로는 변할 것으로 봅니다. 다만 아시아 학자들이 서구의 선입견에 맞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할 지적 자신감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서구 모델을 그대로 베껴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과 조건으로 발전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효과적인 모델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해리스공공정책대학원 석좌교수는 정치경제학 분야 석학이다. 지리적 요인이나 민족적 특성보다 국가가 선택한 제도의 차이가 경제 발전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을 밝혀내 지난해 다론 아제모을루·사이먼 존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아제모을루 교수와 함께 쓴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좁은 회랑>으로 유명하다.
로빈슨 교수는 자신을 경제학자 겸 정치학자로 소개한다. 그는 1982년 런던정치경제대(LSE)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바로 경제학과 교수가 되는 대신 정치 제도, 공공정책 등으로 눈길을 돌렸다. 2004년 하버드대 교수가 되면서 행정학과 공공정책 등을 가르쳤다. 2015년부터는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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