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마이애미가 9월 서울에 온다. 12월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메인 행사의 사전 전시 개최국으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를 택했다. 아시아 지역 최초, 단독 행사다.
디자인 마이애미는 천편일률적인 아트페어의 공식을 깨며 주목받은 공예·디자인 페어다. 하얀색 부스를 구획별로 나누고, 그 안에 그림을 걸거나 설치 작품으로 채우는 게 기존 방식이었다면, 디자인 마이애미는 참여 갤러리 수를 30~60곳으로 줄이는 대신 ‘누구나 꿈꾸는, 거실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했다. 이미 잘 알려진 거장 디자이너의 최고급 가구는 물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들을 세계 각국에서 끌어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추구했다.

또 한 가지. 기존 아트페어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 디자인 마이애미에선 허용된다. “그림이나 조각을 만지지 마세요”가 아니라, “의자나 소파에 앉아보고 장식장 문도 열어보세요”라고 말한다. 예술적 디자인이 적용됐지만 누군가가 사용해야만 그 쓰임이 생기는 작품의 본질을 적극 수용한 것. 장벽이 낮아진 만큼 사람들은 더 활기차게 앉거나 누워서 작품을 감상하기도 하고, 부스 곳곳에선 작가들이 직접 나와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관람객과 소통한다.
‘디자인 마이애미 인 시추’는 프리즈서울·KIAF 등 다양한 아트페어와 비엔날레와 함께 열린다. 해외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디자인 마이애미는 세계 여러 나라의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이벤트를 선보이는데, 서울 인 시추 행사 역시 이런 맥락이다. 지역 디자인 커뮤니티를 발굴·육성하고 디자이너 커뮤니티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했으며, 장기간 전시 형태의 인 시추 행사로 열리는 건 이번이 세계 최초다. 지난 7월 미국 콜로라도주 아스펜에서 진행한 행사는 일일 프로그램에 그쳤다.
9월 1일부터 14일까지 2주간 계속되는 이 행사의 주제는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 Illuminated: A Spotlight on Korean Design’. 전시명 ‘illuminated’는 한국어 조명에서 영감받아 붙인 것이다. 17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통해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한국 디자인의 스펙트럼을 선보인다. 세계적 행사인 만큼 유수의 글로벌 디자인 갤러리 16곳도 참여한다. 런던, 파리, 뉴욕, LA에 지점을 둔 ‘카펜터스 워크숍 갤러리’, 뉴욕의 ‘살롱 94 디자인’, 런던의 ‘찰스 버넌드 갤러리’, 브뤼셀·제네바의 ‘오브젝츠 위드 내러티브스’ 등이 직접 선별한 한국 작가들의 감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전통의 재해석, 우리 고유의 방식 스민 170여 작품
김민재, 이광호, 정다혜, 최병훈 등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 71명의 작품이 한데 모여 한국 컬렉터블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펼친다.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그들의 작품에는 한국적 요소가 녹아 있다. 옻칠 전통이나 백자 기법, 전통 누비 기법인 보자기와 조선 시대 볏짚 민속공예, 말총공예 등 오랜 시간 전승돼온 방식들이 한국 작가들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다.
유다현 작가는 조선 시대 볏짚 민속공예의 직조 기법을 가죽에 처음 적용한 가죽공예가다. 그는 이번 전시에 이 같은 방식으로 만든 직조 케이스 2점을 선보인다. 김동준 도예가는 백자의 전통 기법을 계승해 오로지 장작 가마만으로 도자기를 굽는다. 현재 많은 도예가가 전기 가마나 가스 가마를 활용하지만, 그는 직접 목재를 준비해 가마의 불을 지피는 ‘슬로 크래프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장작 가마 소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울퉁불퉁한 표면이 특징인 ‘Moon Jar’를 출품한다.


한지를 재해석한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이정인 작가는 옛 창살에 한지를 붙이는 전통 기법을 현대적으로 풀어내 독특한 조각 형태의 의자를 제작한다. 한국인 최초로 2022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에서 우승을 차지한 정다혜 작가는 전통 한국 모자공예의 직조 기법에서 영감을 받아 제주 지역의 말총을 활용한 독창적 공예 기법을 개발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검은 말총을 정교하게 엮어 완성한 가로 약 50cm의 바구니 형태 작품 ‘A Time of Serenity’를 선보인다.

한국 디자인의 새로운 결을 만나다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확장한 최병훈 작가와 김민재 작가의 작품은 이번 행사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최병훈 작가는 한국 최초로 ‘아트 퍼니처’ 개념을 도입한 인물이자, 한국 고유의 예술성과 철학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해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목재나 돌과 같은 자연 재료를 활용한 그의 작업은 한국 공예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면서도, 시대를 초월하고 세계적인 시각을 담아낸다. 이번 행사에 인위성을 배제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포용한 ‘Afterimage of Beginning 021-577’과 ‘Afterimage of Beginning 018-499’ 두 작품을 선보여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한국 현대 아트 퍼니처의 진수를 보여준다.

건축과 디자인을 넘나드는 활동으로 주목받는 김민재 작가는 신작을 공개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예술가의 은거 공간 Artist’s Retreat이라는 가상의 주제를 바탕으로, 세 가지 주요 가구 ‘Daybed With Pillow’, ‘Ruffled Chair’, ‘Lamp With Roof’를 삼각 구도로 구성해 선보인다. 특히 작가가 서울에서 직접 제작한 ‘Daybed With Pillow’는 전통 비단 매트리스(보료)가 서구의 데이베드나 셰즈 롱그와 같은 가구에 의해 바닥에서 들어 올려지는 모습을 연출한다. 이는 김민재가 한국적 시각으로 유럽 디자인 역사를 처음 접한 이후 지속적으로 매료되어온 가구 유형이다.
‘Ruffled Chair’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독의 의자와 미국 뉴웨이브 밴드 토킹 헤즈의 창립 멤버인 데이비드 번이 콘서트 영화에서 입은 오버사이즈 의상의 실루엣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전시 외에도 디자인의 주요 이슈를 공유하는 토크 프로그램과 VIP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토크 프로그램에서는 동시대 디자인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브랜드, 컬렉터, 업계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여 국제 디자인 트렌드와 산업 방향에 대한 담론을 나눌 예정이다. 젠 로버츠 디자인 마이애미 CEO는 “서울은 글로벌 디자인 창작의 거점이자 신진과 거장의 에너지가 교차하는 동시대적 장소”라며, “2005년 디자인 마이애미 첫 회에서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된 고故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인 DDP에서 전시를 열게 돼 더 뜻깊다”고 밝혔다.
디자인 마이애미가 선보이는 국내 첫 전시의 큐레이터는 조혜영이 맡았다. 국내외 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하며 동시대 공예 예술의 흐름을 소개해온 인물. 한국조형디자인협회 이사장, 통영국제트리엔날레 수석큐레이터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공예를 세계에 알려온 안목과 저력으로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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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 마이애미는 공장식 아트페어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깃거리와 컬렉터를 발굴한 부티크 아트페어다.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DDP를 운영하는 서울시 산하 서울디자인재단은 2023년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디자인 마이애미 유치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그동안 미술 분야에서 국내와 해외를 연결하는 일을 해왔고, 자연스럽게 디자인 마이애미의 유치에 나서게 됐다. 9월 한국의 미술 주간마다 디자인과 공예 분야가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는데, 서울시가 디자인 분야에서 ‘유네스코 창의 도시’로 지정된 만큼 국제기관과의 협력은 그 의미가 더욱 컸다. 한국은 이미 아시아 미술의 허브로 입지가 공고하다. 한국만큼 우수한 창작자를 보유한 나라는 드물다. 양혜규, 서도호, 이불 등 세계적 작가 역시 설치와 조각 등을 넘나들며 한국적 창작 정신을 널리 알리고 있다. 최근 한국의 디자인·공예 작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 이 흐름을 가속화한 것 같다. 2017년 이후 한국에서 총 35명의 파이널리스트와 1명의 우승자가 배출됐고, 이를 계기로 해외 무대에 소개되거나 해외 갤러리와 전속 계약하는 작가가 크게 늘었다.”

▶ 디자인 마이애미가 바젤에 이어 파리에 진출했지만, 아시아에서 서울을 지목한 게 인상적이다. 서울의 어떤 매력이 작용했나?
“프리즈 서울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생각한다. 프리즈 서울 4년간 해외에서 바라보는 한국 미술계의 위상이 달라졌다. 서울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문화적으로 공존하는 도시여서 그 자체로 매력적이고 경쟁력이 있다. 역동적 에너지와 더불어 풍부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갖추고 있다는 것 또한 큰 장점이다. 젠틀몬스터, 탬버린즈 브랜드들이 보여주듯, 디자인 분야에서도 한국은 이미 21세기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 전시 주제인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전시의 영문명이 ‘Illuminated: A Spotlight on Korean Design’이다. 우선 한국어 ‘조명照明’에서 영감을 얻었다. ‘빛을 비추다’, ‘드러내다’라는 의미처럼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디자이너와 공예가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동시에 한국 디자이너와 공예가들이 어떻게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며 보편적 언어로 소통하는지를 탐구한다는 주제다. ‘한국적인 것’이 경계를 짓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적 담론 속에서 독창적 목소리로 자리 잡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울의 창작 현장은 오랜 시간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전해왔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미국과 일본을 시작으로, 영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덴마크·스웨덴·핀란드 등지에서 수학한 한국 디자이너들이 글로벌 영향력을 한국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며 독창적 디자인 문화를 형성해왔다. 이 과정은 단순한 차용이 아닌, 세계와 깊이 소통하면서도 뚜렷한 한국적 개성을 드러내는 창작 흐름을 만들었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더 널리 알리고 싶었다.”

▶ 글로벌 디자인 갤러리 16곳이 한국 작가를 선발했다. 선정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해외 갤러리 12곳, 한국 갤러리 4곳이다. 독립적으로 참여하는 디자이너와 작가도 있고, 로에베 재단 공예상 파이널리스트 등으로 구성돼 있다.
현대미술에서 세계적으로 톱클래스 상업 갤러리가 존재하듯, 디자인 분야에서도 오랫동안 가구와 오브제 등을 전문으로 다뤄온 저명한 갤러리가 있다. 주로 미국 뉴욕에 자리한 이 갤러리들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한국 작가들을 전속 작가로 채용하며, 작품 판매와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왔다. 이번 전시는 디자인 마이애미 페어에 고정적으로 참여하는 갤러리를 중심으로 한국 작가들을 검토했다. 작가 선정 과정에는 서울디자인재단과 디자인 마이애미 측이 함께했다. 참여하는 한국 갤러리 4곳 역시 해외에서 이미 활발히 활동하며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갤러리 SKLO, 갤러리 O, 솔루나아트그룹, 갤러리 LVS 등이다.”
▶ 한국 공예는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에서 차별적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시각적으로 볼 때, 한국의 창작물은 현시대의 트렌드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전반적으로 현대적이며, 작가의 절제가 느껴진다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창작자 자신을 표현하면서도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며, 디자인적으로도 세련됐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 깔끔하고 따뜻한 감성을 지닌 점 또한 한국 창작물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71명의 디자이너와 작가들의 작품은 어디에 놓아도 훌륭하며, 일상 공간에 포인트가 되어줄 수 있는 창작물이다.”

▶ 장인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젊은 장인을 발굴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장면과 흐름을 공유해달라.
“정다혜 작가는 마치 한국을 대표하는 홍보대사 같다. 해외 여러 나라에서 그녀의 작업에 관심을 보이며, 전시 제안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유리 분야의 이태훈 작가도 주목할 만하다. 가장 아름다운 선으로 블로잉 작업을 선보이는데, 유리의 섬세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윤라희 디자이너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구를 창작하며, 실용성과 미학을 균형 있게 담아낸다.”
▶ 회화나 설치미술 같은 순수예술처럼, 공예와 디자인 분야도 수집가가 인정하고 알아봐주는 과정이 중요할 것 같다. 한국에선 아직까지 하이엔드 공예 수집이 대중화되지 않았는데.
“디자인 분야에는 뚜렷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디자인 마이애미는 하이엔드 디자인과 오브제, 실내 공간과 조화로운 작품들을 소개하는 국제적인 플랫폼이다. 컬렉팅 관점에서도 디자인 작품은 회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컬렉터 각자의 취향이며, 그 선택이 작품을 경험하고 공간에 배치하는 핵심 기준이 된다. 다만 세금 문제 같은 부분은 국가 차원에서 제도적 해결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강은영·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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