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저녁 6시(현지 시간) 페스티벌 개막식 서두에 나는 300여 청중 앞에서 시 「제왕나비」를 한국어로 낭독했다. 뒤이어 이탈리아 시인이 이탈리아어로 「제왕나비」를 읽었다.
낯선 한국 시인의 등장에 청중은 약간 당황한 것 같았으나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 일제히 시선을 집중하고 한국어로 읽는 시 낭독에 집중했다. 모두 난생처음 한국어로 읽는 시를 듣는 신기한 경험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다들 호기심에 가득 찬 모습이었고 한국어가 아름답다는 반응이었다. 시 낭송을 마치고 무대 뒤 계단을 내려오는데 관계자들이 아주 친근하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시인 스테파노 도노(Stefano Donno)는 시집 해설에서 “현대 한국 시의 우주 안에서 짧음은 제약이 아니라 생성의 힘이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하나의 모자이크처럼 다채로운 서정적 직관, 의식의 파편, 유예된 깨달음을 펼쳐 보인다. 각 시에서 목소리는 응축되면서 진동한다. 네 행은 네 번의 심장박동, 네 번의 호흡, 무한으로 향하는 네 개의 문장처럼 울린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한국 현대시가 이탈리아어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레체에 있는 작은 출판사 ‘이 콰데르니 델 바르도(I Quaderni del Bardo)’와 이탈리아 북부 코모시에 거주하면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시인 라우라 가라바글리아의 다양한 시적 비전 및 창조적 교차로 이루어졌으며 이 선집은 단순한 문학적 작업이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행위이기도 한데 그것은 개방과 인정의 몸짓이다. 경계가 닫히는 시대에 이 시들은 감각의 새로운 지도를 그린다.”
그는 “이 선집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시는 거창한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단 네 줄로도 영원을 향한 물음을 던지고, 정체성을 흔들고, 잃어버린 사랑을 불러내고, 내적 혁명의 시작을 가리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동호의 4행시 「진정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그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시들은 독자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듣게 한다. 마지막 행은 고요의 감정으로 듣게 한다. 이는 계시이다. 귀한 것은 침묵 속에 있으나, 땅속에서 맥동한다. 그것은 명상적 시학의 전형이며, 사물 사이의 여백이 그 의미를 획득한다”고 평했다.
스승의 가르침은 말씀이 아니라
침묵이다
후학이 진정 배워야 할 가르침은
침묵의 전율
-- 최동호 「진정한 가르침」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일이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김추인의 「오래된 기억」에서 과거는 지하수처럼 다시 솟아오르는 내적 장소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아버지는 그녀보다 젊은 모습으로 상자 속에서 나타나,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낸다. 단 몇 행에 응축된 소설 한 편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파편을 살아 있는 순환적 시간 속에서 호흡하게 하는 한국 시학은 죽은 이들이 말하고 현재가 늘 우리 앞선 어떤 것의 흔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상자 속에서 그가 나왔다 나보다
젊은 아버지
내 흰 머리칼을 뽑아 주신다
우리 희야, 많이 힘들구나-
-- 김추인 「오래된 기억」
동시영의 「우주 아파트」는 따스한 아이러니로 중력을 흔드는 비스듬한 시선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주는 달의 1층, 지구가 2층에 있는 집이고 시인은 소리 내지 않으려 천천히 걷는다. 유치한가? 그렇다. 그러나 모든 진정한 시인이 그렇듯 그는 세계를 창조하고 위계를 뒤집으며 가벼운 농담으로 우주를 그려낼 수 있는 존재이다.
우주 속, 달은 1층 지구는 2층
한밤중 달그락거리는 내 발자국
층간 소음 걱정되어 살살 걷는다
달이 쌩끗 웃어 준다
-- 동시영 「우주 아파트」
김구슬의 「삼각형」은 철학적,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 찬 비전을 제시한다. 삼각형과 사각형 사이에서 삶은 불확실한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는 무정형의 형상이다. 합리성의 상징인 기하학은 삶의 진동, 불완전함이라는 진실에 자리를 내준다. 시구는 불안정한 것 속에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평행선으론 그대 만날 수 없어
삼각형 꼭지점을 향하고,
정삼각형이 될 수 없어
찌그러진 삼각형을 응시한다.
-- 김구슬 「삼각형」
스테파노 도노는 나와 대담하는 자리에서 디지털 시대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 누구나 통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문화 현상을 간결하게 표현한 시를 하나 예로 들었다. 먼저 소리 없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벼운 어조로 병치시킨 다음 이에 대한 반전을 통해 살아 있는 인간의 감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문자 메시지에 매몰된 인간 그러나 짧은 진동 소리에 인간적 감정을 되찾고 인간성의 회복을 이렇게 평범한 어조로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경쾌하고도 놀라운 시적 변형이다.
글자 본디 소리 없고
전파 또한 보이지 않는데
이 짧은 진동 하나에
하루 종일 흔들리는 나.
--고두현 「문자 메시지」
이탈리아 독자들은 모두 이 낯선 형식의 4행시들이 보여주는 영감, 감각, 재치 그리고 여백의 에너지에 모두 정서적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청중은 집중된 시선으로 높은 호응을 보였으며, 특히 한국어로 낭송되는 말소리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들 대부분 처음 듣는 한국어 말소리에 매료된 듯, 한국어가 매우 신비롭고 음악적이며 마력적이라면서 신기해했다.
나는 “제왕나비가 월동을 위해 북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날아가는 도중에 이탈리아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고 있다”며 “제왕나비의 이동은 아직도 수렵시대 인류의 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동 현상”이라고 말했다. 또 “제왕나비의 이동과 회귀는 생명의 영원한 반복과 연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패턴을 실증하는 살아 있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고래들도 그들 나름대로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근 연구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향유고래의 멸종은 이어져 있던 생명의 고리가 끊어져 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는 기후 위기로 인해 전 지구적으로 야기된 중요한 이변 현상을 뜻하는 것”이라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8월 향유고래가 새겨진 한국의 반구대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사실도 보고했다.
마지막으로 ‘경이로운 빛의 인간’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것은 인간이 육신을 버리고 열반하여 빛으로 도약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먼저 2500년 전 석가의 열반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2000년 전 예수의 부활과 같은 경이로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사한 현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답했다. 석가나 예수 모두 육신을 버리고 빛으로 부활하고 이들이 영원성을 갖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 시간 넘게 시 낭송과 독자들과의 진지한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햇빛은 프레스코 벽화처럼 하얀 벽면을 엷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며 지나고 있었다. 마치 시를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황금빛이라는 것처럼.
한국어 시 낭독에 대한 반응은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다. 청중 중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모두 시인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으며, 사인할 때 이탈리아인들은 한국어 글씨체가 신기한 듯 사인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당일 출판사가 준비한 100권의 시집 중 80여 권이 판매되었다. 출판가 관계자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에서도 한국의 4행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시인협회에서 간행하는 기관지 <아고라(Agora)> 9월호에 최동호의 ‘디지털 시대와 현대 한국 4행시’ 에세이가 4쪽에 걸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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