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도 사람들은 불황의 단서를 소비 습관에서 찾아왔다. 립스틱 효과나 치마 길이 이론이 대표적이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에스티 로더의 립스틱 판매가 11% 급증한 사실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작은 사치’를 통해 불안을 달래려는 인간 심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비자는 립스틱 한 개로 위안을 얻지 않는다. 그들은 소유보다 경험을, 가격보다 가치를 중시하며 위로의 방식 또한 달라졌다. 불황의 징후는 이제 화장대가 아니라 물류창고와 앱 화면 속에서 나타난다.

최근 워싱턴포스트는 립스틱 소비가 더 이상 경기 침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비공식 지표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골판지 상자 생산률, 간편식 매출, 대형 트럭 판매율, 중고 의류 판매율, 이직 감소, 주택담보대출 증가와 주거용 건물 허가 감소 등이 그것이다.
골판지 상자 생산량의 감소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올해 미국 생산량은 전년 대비 5% 줄었다. 골판지는 온라인 쇼핑과 물류의 상징이며, 실물경제의 체온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상자의 감소는 곧 주문 감소, 물류 위축, 소비 냉각을 의미한다. 유통업체들은 이미 재고를 줄이며 다가올 ‘긴 겨울’을 대비하고 있다.
고용의 흐름도 변화를 보여준다. 2020년 ‘대퇴사 시대’라 불릴 만큼 근로자 이동이 활발했던 미국에서 최근 퇴사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는 단순한 안정 고용이 아니라 기업의 자신감이 식고 구인 시장이 위축되었음을 의미한다. 퇴사율의 하락은 기업 투자심리 위축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소비 위축과 경기 둔화를 가속화한다.
소비자 행동 또한 눈에 띄게 달라졌다. 미국에서는 중고품 매장을 찾는 소비자가 팬데믹 이전보다 40% 가까이 늘었고, 중고 거래 앱 ‘레드업(ThredUp)’ 거래액은 16% 증가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당근마켓의 2024년 매출은 1,891억 원, 영업이익은 376억 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48%, 3.8배 증가했다. 2025년 1분기에도 고속 성장이 이어져 매출 578억 원, 영업이익 164억 원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새 제품 한 개 대신 중고 여러 개를 선택하며, 단순 절약이 아닌 ‘지출의 재배치’를 통해 불황 속 생존 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정책 요인과도 맞물린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강화된 관세는 여전히 중소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원가 상승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은 생산지를 옮기거나 사업을 접고 있다. 미국 전체 고용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위축은 곧 고용 불안으로 이어지며, 경기 하강 압력을 높인다. 물류, 소비, 고용이 동시에 식어가는 흐름은 전형적인 경기 냉각의 신호다.
겉으로는 미국 경제가 여전히 견고해 보인다. 그러나 올해 1분기 성장률은 1.6%로 예상을 크게 밑돌았고,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3.4%를 기록했다. 제조업 지표는 9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고, 고용 통계도 두 달 연속 하향 조정됐다. 겉보기에는 ‘괜찮은 경제’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소비, 물류, 고용이 동시에 냉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경제의 언어는 숫자에서 행동으로 이동하고 있다. 립스틱 대신 골판지 상자가, 주가 대신 퇴사율과 중고 거래가 경기의 흐름을 말해준다. 거대한 통계는 언제나 뒤늦게 반응하지만, 사람들의 일상은 이미 변하고 있다. 불황은 데이터로 측정되기 전에 사람들의 행동에서 먼저 시작된다. 그렇기에 현명한 관찰자는 화려한 수치보다 평범한 소비 변화를 먼저 읽는다. 그것이 오늘날 경제를 가장 인간적이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경영평론가(ijeong13@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