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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전진' 80년…한진그룹 창업주·선대회장 리더십 조명

입력 2025-10-27 14:58   수정 2025-10-27 15:06

“신념을 갖고 추진한 창업자의 철학이 면면히 살아 숨쉬는 기업이야말로,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만인을 위해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내가 걸어온 길> 中

오는 11월 1일 한진그룹 창립 8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하늘과 땅에 수송의 길을 새로 만들고 닦아 넓혀놓은 조중훈 창업주와 조양호 선대회장의 리더십이 재조명되고 있다.

조중훈 창업주와 조양호 선대회장은 일평생 운송으로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의미의 ‘수송보국(輸送報國)’을 신념으로 관련 산업을 발전시켰다. 선대 경영진의 뜻을 이어온 한진그룹은 글로벌 종합 운송 기업으로서 100년을 향해가고 있다.
○‘사업 예술가’ 조중훈 창업주…신용과 결단으로 길 위에 새긴 역사
해방 직후인 1945년 스물다섯살이던 조중훈 창업주는 트럭 한 대를 장만하고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었다. 교통과 수송은 인체의 혈관처럼 한 국가의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 산업이므로,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으로 우리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중훈 창업주는 한진상사 창업 초창기부터 ‘신용’을 가장 중시하며 사세를 키워나갔다. 6·25 전쟁 직후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부채만 남았을 때도 있었지만, 그간 쌓아온 신용으로 2년 만에 전쟁 직전의 사세를 회복했다. 한진상사는 미 군수품 책임제 수송, 주월미군 군수품 수송 등을 맡으며 회사를 키워나갔다. 1956년도에는 1인당 국민 소득이 백 달러도 안 되던 시절 7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미군과 직접 맺기도 했다. 이 무렵 본사도 인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조중훈 창업주는 특유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동시에 당당함을 지켜 신용을 쌓아왔다. 당시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던 벤츠 승용차를 타며 기업인으로서의 확실한 신뢰감을 심어주고, 인연을 맺은 거래처를 서울 부암동 자택에 초대했다. 그는 한진그룹의 사훈이 된 ‘창의와 신념, 성의와 실천, 책임과 봉사’를 매사에 강조했다.

한진상사 사업이 육송 분야에서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자 조중훈 창업주는 ‘하늘에서의 수송’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처음에는 부실 덩어리였던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망설였다. 하지만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이며,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에는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냐”는 박정희 대통령의 거듭된 요청에 항공공사 인수를 약속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반대하는 회사 중역들에게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고 설득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이 곧 인간’이라는 소신으로 기존 항공공사 직원들을 모두 끌어안고 부채 27억짜리 회사의 정상화에 나섰다. 당시 새로운 개념이었던 성과별 인센티브 제도도 도입했다. 숨은 일꾼들이 일하는 현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조중훈 창업주는 수시로 정비 현장을 찾았다. 항공공사 인수 초기 제트기 1대 외에는 변변한 항공기도 없었지만 기재를 늘리고 공격적으로 노선을 확대했다. 민영화 첫해 서울, 오사카, 타이베이, 홍콩, 사이공, 방콕을 연결하는 동남아 최장 노선을 개설했다. 사이공 취항은 베트남전에 파병된 우리나라 군인과 기술자들을 국적기에 태워야 한다는 조중훈 창업주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미 태평양 노선과 유럽 항로를 개척하며 국제항공사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전 세계에 오일쇼크 위기가 닥쳤지만 ‘새로운 도전 없이는 발전도 없다’는 경영 전략으로 미래를 대비했다. 항공기 구매를 추진하는 한편, 대형 IBM 컴퓨터를 도입해 국제선 여객 예약 전산 시스템을 추진하는 등 서비스 개선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73년 미주로 향하는 태평양 노선에 보잉 747 점보기를 투입했고, 이듬해 같은 기종을 추가 도입해 화물기로 투입했다. 전 세계 최초로 점보기를 화물 노선에 투입함으로써 화물 수송 분야에 새 전기를 열었다. 오일쇼크 위기를 극복한 대한항공은 1975년 매출액 1000억 원을 돌파하고 흑자를 기록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항공 운송 사업에서 안전과 정시성을 중시했다.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우는 조종사들에게 끊임없는 훈련과 완벽한 기술 습득을 요구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제주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조종사 양성 기관인 제주비행훈련원(정석비행장)을 세웠다. 해외 기관에 위탁했던 조종사 훈련을 국내에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고가의 모의 비행 훈련 장비 시뮬레이터를 도입해 조종사 훈련에 차질이 없도록 지원했다.

현재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의 기반이 된 항공기 제작 업무도 조중훈 창업주가 씨앗을 심었다. 전투기 정비 경험이 있던 대한항공에 국산 전투기를 생산하라는 당시 정부의 요청이 있었던 것. 조중훈 창업주는 1976년 말 경남 김해 일대에 항공 산업 시설을 갖춘 공장(현 테크센터)을 준공하고 1982년 우리나라 최초 국산 전투기 ‘제공호’를 출고했다. 이를 계기로 단순 정비만 하던 국내 항공 산업도 완제기를 조립 생산해내는 면허생산 단계로 한 단계 도약했다. 또한 창공 1,2호 등 초경량 항공기 개발을 거쳐 1991년 국내 최초의 실용 항공기로 등록된 창공 91호를 개발했다.

조중훈 창업주는 1968년 인하학원,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하는 등 인재 양성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88년에는 국내 최초 사내 산업대학인 한진산업대학(현 정석대학)을 설립해 직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기업 활동 뿐만 아니라 국익을 위한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1970년대 유럽 신생 항공기 제작사 에어버스의 항공기를 구매해 한국과 프랑스 외교에 도움을 준 일화는 유명하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는 서울올림픽 유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간 쌓아온 프랑스 정·재계 인맥을 총동원해 끈질긴 설득을 하는 한편,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 대표들을 일일이 만나 마음을 돌린 결과였다. 조중훈 창업주는 프랑스 정부 훈장 3차례를 비롯해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몽골 정부로부터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업계에서는 조중훈 창업주를 대한민국 외교 무대 막후에서 헌신한 민간 외교관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스템 경영 선구자’ 조양호 선대회장…한진그룹 본격적 도약
조양호 선대회장은 조중훈 창업주가 일군 한진그룹을 본격적으로 성장시켰다. 미국 유학 중 귀국해 군에 입대(육군 제7사단)했다. 제대 직후인 1974년 대한항공 정비 담당 직원으로 입사해 현장에서 기초부터 철저한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후 기획, 자재, 정보통신(IT), 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실무 분야를 두루 거쳤다.

공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조양호 선대회장은 아버지 조중훈 창업주가 그린 ‘사업의 예술’이라는 밑그림에 ‘시스템 경영’이라는 색깔을 더하며 한진그룹을 발전시켰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시스템을 잘 만들어 놓으면 누가 그 자리에 가도 업무가 돌아간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인맥이나 이해관계에 좌우되기보다는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제도를 정착했다. 1989년에는 한진정보통신을 설립해 물류 그룹의 중추가 되는 정보통신망을 구축하고, IT 인프라를 바탕으로 운항과 객실, 정비, 경영을 유기적으로 융합시켰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안전을 타협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적당주의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며 “절대 방심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익숙한 것일 지라도 항상 처음 대한다는 자세로 원칙과 규정에 따라 신중하게 업무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항공의 안전 시스템 경영은 이 시기에 자리 잡았다. 안전 운항을 독려할 수 있도록 비행운영품질보증과 안전장려금제도를 시행했다.



또한 고객 중심 서비스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항공업계가 위기에 처했던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에도 승객들에게 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국가신용도가 급락하면서 항공기 도입 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웠지만, 편리한 스케줄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갖춘 항공사가 되기 위해 신형기 도입을 추진했다.

이후 거듭된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도 조양호 선대회장은 차세대 항공기를 도입할 기회를 간파했다. 그는 2008년 한진그룹 저비용항공사(LCC)인 진에어 출범 당시에도 “비용을 줄여 발생한 수익은 승객에게 되돌려줘야 한다”며 고객 중심 서비스를 강조했다.

1990년대 항공 시장이 자유화되면서 조양호 선대회장은 상호협력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 판단했다. 이미 세계 항공업계는 스타얼라이언스, 원월드 등 동맹체로 재편되고 있었다. 조양호 선대회장과 각별한 신뢰를 지닌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CEO들은 대한항공과 함께 ‘스카이팀(SkyTeam)’을 출범했다. 2024년 말 기준 스카이팀은 18개 항공사가 모인 동맹체로 발전했으며 전 세계 160개국 1000여개 도시에 취항하고 있다. 2018년에는 미국 델타항공과 조인트벤처를 맺어 태평양 노선을 강화했다.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항공산업 위상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항공업계의 유엔(UN)이라 불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서 핵심 역할을 맡은 것. 1996년부터 IATA 최고 정책 심의·의결 기구인 집행위원회 위원을, 2014년부터는 전략정책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조양호 선대회장의 쉼없는 노력은 2019년 IATA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었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아버지 조중훈 창업주가 했던 민간 외교관 활동을 이어갔다. 프랑스 루브르, 러시아 에르미타주, 영국 대영박물관 등 세계 3대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성사시킨 것. 그는 한불최고경영자클럽 회장으로 한국과 프랑스 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해 2004년과 201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이웃나라 몽골에 직원들을 직접 데리고 서울 여의도공원 2배 크기의 방풍림을 조성했다. 대한항공 임직원들은 20년 넘게 매년 이곳에 나무를 심고 관리하며 사막화 방지에 기여하고 있다.

스포츠를 사랑한 기업인으로도 유명하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선수들이 메달을 못 따면 졸업 후 사회 진출에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비인기 종목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대한항공 배구단, 탁구단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2011년에는 스피드스케이팅팀도 창단했다. 선수들의 성적은 물론 장래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현정화, 유승민 등 당대 걸출한 선수들에게 은퇴 후 진로까지 고민하라고 조언했다. 국내 최초의 동계올림픽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도 힘썼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각종 현안들을 해결하고 평창동계올림픽을 본 궤도에 올린 장본인이었다.

조중훈 창업주가 만들고 조양호 선대회장이 발전시킨 한진그룹의 ‘한진’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대한민국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국민기업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며 "80년간 우리 국민들의 자부심이 되어 온 한진그룹은 앞으로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가 믿고 사랑하는 글로벌 종합수송그룹으로 성장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신정은 기자 newye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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