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커만과 공동우승에 오른 정경화의 커리어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탔다. 뉴욕 필하모닉과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곧바로 메이저 무대로 올라서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다. 이후 나단 밀스타인을 대신해 백악관 갈라 행사에 초청되었고, 1970년에는 이츠하크 펄만을 대신해 런던 심포니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계기로 한국인 최초로 데카 아티스트로 독점 계약을 맺었다. 데카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클래식 음반 레이블 가운데 하나였고, 동양의 젊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제안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정경화는 데뷔 앨범부터 뛰어난 평가를 받으며 투어를 이어갔고, 유럽과 미국 주요 무대에서 연이은 성공을 거두며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1990년대에 들어 오른쪽 손가락 통증이 장기화되면서 활동을 축소하게 되었고, 이는 녹음과 공연 일정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무대를 떠나다시피 했으며, 회복과 재활에 집중하며 긴 공백기를 보내야 했다. 2010년부터 점진적인 복귀를 준비한 끝에 2011년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열린 바흐 전곡 리사이틀 시리즈로 돌아왔고, 공백기 동안 내면화된 깊은 통찰과 절제된 표현으로 호평을 받았다.
올해로 77세를 맞이한 정경화의 리사이틀을 찾은 관객들은 무엇을 기대했을까.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카네기홀 무대에서 그가 어떤 선물을 꺼내 보일지에 대한 객석의 기대감이 느껴졌다.

지난 7일(현지시간) 열린 리사이틀은 낭만시대 작곡가 세 명의 작품으로만 꾸려졌다. 슈만은 내면을 말하는 작곡가다. 서정성이 강하지만 감정의 기복이 격렬하고 불안정하다. 정경화는 이 드라마를 관객들이 따라갈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안내했다. 왼손은 과감한 시프트를, 오른손은 단호한 필치로 작품을 이어갔다. 연주 초반에는 사운드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2,800석 규모의 카네기홀 스턴 오디토리움은 솔로 리사이틀에 최적화된 공간이라 보기 어렵다. 한두 명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객석까지 또렷하게 닿기 전에 공간 속으로 쉽게 흩어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특유의 날카롭고 직선적인 사운드를 구사하던 정경화였다면 느낌이 조금 달랐을까?
35년 만에 정경화의 연주를 다시 찾았다는 한 관객은 “예전과 같은 에너지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거장의 풍모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국계 젊은 관객은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며 그의 음반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고 했다. 객석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무대 위의 숨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며, 희미하게 사라지듯 노래하는 느린 장면에서도 누구 하나 집중을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연주한 그리그 소나타 3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소리 크기의 스펙트럼을 넘어서는 그의 표현력이었다. 다이내믹한 리듬을 얹은 서정미는 아름다운 대비를 이뤘고, 작품이 전면에 내세우는 극적인 대조가 생동감 있게 드러났다.
이날 공연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꼽는다면 케빈 케너의 연주로 시작되는 2악장이었다. 피아노가 연주하는 첫 40여 마디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케이팝 발라드나 드라마 OST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첫 음이 울리는 순간 듣는 이의 마음을 단번에 녹여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피아노 솔로를 지나 선율을 이어받은 정경화는 라벨이 연상되는 3악장 도입부에서 관중이 가득 모인 서커스장에서 능숙하게 외줄 위를 타는 연기자가 되었다. 그의 활 동작 하나하나에는 확신과 목적이 담겨 있었다. 노르웨이 민속 음악의 색채가 곳곳에 스며 있는 이 작품은 전체 프로그램에 다양함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중심축 역할을 했다.

프랑크 소나타는 낭만주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정점에 놓인 작품으로 꼽힌다. 곡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반복되며 구조적 완성도가 높다. 정경화도 음반과 공연에서 이 곡을 여러 차례 연주하며 특별한 애착을 보여왔다. 이날 두 연주자는 눈을 맞추지 않아도 숨결만으로 서로의 의도를 읽어내며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특히 4악장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아가는 순간, 흑백 화면 속 젊은 정경화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때마다 다가오는 감동은 시간의 층위가 열리고 과거와 현재가 스쳐갈 때 느껴지는 전율에 가까웠다.

프로그램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청중의 환호와 커튼콜을 앙코르로 화답하며 교감을 이어갔고, 홀에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흥이 맴돌았다. 연주 직전 앞자리로 서둘러 달려갔던 그 젊은 바이올린 전공생도, 35년 만에 다시 그의 연주를 들으러 왔다는 노년의 신사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장면을 꺼내 들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공연은 연주가 좋았었다는 기억보다 그 무대가 불러온 분위기와 남겨진 여백이 더 오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경험은 각자의 기억과 만나서 더 길고 깊은 흔적으로 기록된다.
뉴욕=김동민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칼럼니스트
<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border:1px solid #c3c3c3" />정경화 바이올린 리사이틀
2025년 11월 7일
Carnegie Hall (Isaac Stern Auditorium / Ronald O. Perelman Stage)
Kyung Wha Chung, Violin
Kevin Kenner, Piano
1. R. SCHUMANN Violin Sonata No. 1
2. GRIEG Violin Sonata No. 3
3. FRANCK Violin Sonata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