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TO는 2026년 상품 교역량 성장률 전망치를 0.5%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2025년 2.4% 성장은 트럼프 관세 부과 전 물량을 선(先) 확보하려는 일시적 밀어내기 수요였다. 한 중견 수출기업 CEO는 “올해는 미국 바이어들이 발주량을 세 배로 늘렸지만 내년에는 주문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역의 언어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가격이 얼마인가”가 거래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원산지가 어디인가”, “공급망에 우려 국가가 포함되어 있는가”가 거래 성사의 결정 요인이 됐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 스티븐 마이런이 밝혔듯이 관세는 미국 안보 우산에 대한 ‘이용료’를 징수하는 부담 분담(burden?sharing) 수단이 됐다.
예일대 버짓랩(Budget Lab) 분석에 따르면 2025년 10월 말 미국 평균 실효 관세율은 17.9%로 1930년대 이후 최고 수준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으로 상호주의 관세를 제도화했다. FTA 체결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미 관세 협상으로 자동차 등 주요 품목의 관세 상한을 15%로 설정했지만 이는 최소한의 방어선 확보에 불과하다.
800달러 이하 소액 면세 중단의 충격은 예상보다 크다. 2025년 8월 29일부터 사실상 폐지되면서 K뷰티, K패션 전자상거래 수출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관세 인상분은 수출 단가 인하 압박으로 이어지며 이는 기업의 수익성을 직접 위협한다.
EU의 녹색 및 인권 규제도 법적 강제력을 갖췄다. 2026년 1월 1일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확정 기간이 시작된다. 철강, 알루미늄 수출 기업은 실제 배출량에 상응하는 CBAM 인증서를 구매해야 한다. EU 공급망 실사지침(CSDDD)은 전체 공급망에서 인권침해 및 환경 파괴를 식별하고 예방할 법적 의무를 부과한다. 미국 CBP는 위구르 강제노동방지법(UFLPA)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중국 신장 지역에서 생산된 폴리실리콘 사용 가능성을 의심해 한국산 태양광 셀 일부의 통관을 억류·보류한 사례가 있다. 미국은 반도체, 배터리, AI 등 첨단기술 분야 수출 통제를 확대하고 중국은 희토류 수출 통제로 맞대응하며 공급망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다.
G20 신규 수입 제한 조치의 커버리지가 1년 만에 G20 수입의 13%에서 22%로 급증했다. 대미 수출 기업 애로의 66.1%가 관세율 확인과 통관 정보 확보다. 정책 변화가 ‘정치적 반사신경’의 영역으로 진입했다는 증거다.
전략 1: 정책 리스크 인텔리전스 구축
정책 변화를 실시간 예측하고 대응하는 인텔리전스가 생존의 첫 조건이다. CEO는 AI 기반 리스크 대시보드를 도입해 관세율 변동, 수출 통제, 신규 규제를 실시간 감지하는 조기경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무역 정책 전문가와 법무팀을 포함한 ‘정책 리스크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주요 수출국의 관세청, 상무부, 재무부 고시를 일일 모니터링해야 한다. 관세청 품목분류 사전심사나 미국 CBP의 어드밴스 룰링(Advance Ruling) 제도로 HS 코드 및 원산지 판정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한다.
전략 2: 전략적 이원화로 공급망 재편
미·중 탈동조화 압력은 피할 수 없다. 미국 시장용 배터리, 반도체 부품은 호주, 캐나다, 인도네시아 등 비우려국으로 조달처를 다변화해야 한다. 중국 내수용은 중국에서, 글로벌 수출용은 베트남, 인도, 멕시코 등 프렌드 쇼어링 거점으로 이전하여 리스크를 분산해야 한다.
Chip4 등 동맹국 공급망 협력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여 안정적 조달 루트를 확보해야 한다.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 등 전략 품목에 대해서는 정부 간 협력 프레임워크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략 3: 통합 컴플라이언스 체계 확립
규범 준수는 생존의 전제다. 원산지 기준이 핵심이다. 미국 상호관세는 원산지 기준으로 부과되며 단순 조립은 인정받지 못한다. 원재료별 원산지 확인서와 실질변형 증빙 확보가 필수다.
UFLPA와 CSDDD 대응을 위해 공급망 내 강제 노동 무개입 확인서를 확보하고 디지털 추적 플랫폼으로 협력 업체 리스크를 정례 점검해야 한다. EU 수출 기업은 탄소 발자국 인증과 친환경 원료 조달 인증을 사전 확보해야 한다.
전략 4: 현지화와 택스 엔지니어링(Tax Engineering)
관세 장벽이 높은 시장에는 현지 생산으로 대응해야 한다. 미국 내 FTZ(자유무역지대)를 활용하여 관세 유예, 면제, 경감 혜택을 받아야 한다. 미국에는 200개 이상 외국무역지대(FTZ) 프로젝트와 수백 개의 서브존이 지정되어 있으며 FTZ Board의 승인을 전제로 조립·가공·제조 등 생산 활동도 수행할 수 있다.
택스 엔지니어링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제품 설계·구성 단계에서 합법적인 관세 엔지니어링을 통해 저세율 HS 품목에 해당하도록 조정하거나 다단계 거래에서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 퍼스트 세일 룰(First Sale Rule)을 활용해 관세 과세가격을 낮추면 관세 부담을 절감할 수 있다. 이렇게 절감된 비용은 바이어의 가격 인하 요구에 대응하면서도 마진을 유지할 수 있는 재무적 여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 인도(6.5% 성장), 아세안(4.7% 성장) 등 신흥국으로 수출을 다변화해야 한다.
전략 5: 디지털 무역 역량 강화
서비스 무역에서 AI, 클라우드 등 컴퓨터 서비스가 주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각국 데이터 현지화 규정, 개인정보보호 규정 차이는 준법 비용을 증가시킨다. 유럽 시장 진출 시 유럽 내 서버 설치 등 현지 법규에 맞는 데이터 관리 방침을 수립해야 한다. 핀테크 결제, 온라인 마케팅으로 비대면 수출 채널을 개발하고 AI와 빅데이터로 무역 컴플라이언스를 자동화해야 한다.
정책 모니터링: AI 리스크 대시보드 구축, 정책 리스크 태스크포스 운영, 품목분류 사전심사 활용, 주요 수출국 관세 규정 일일 모니터링, 실시간 규제 감지 시스템 가동
공급망 재편: 비우려국 조달처 다변화 로드맵, 프렌드 쇼어링 거점 이전 검토, 동맹국 협력 프로그램 참여, 중국산 부품 의존도 분석
컴플라이언스: 원재료별 원산지 확인서 확보, 실질변형 증빙 서류 준비, 강제 노동 무개입 확인서 점검, CBAM 인증 및 탄소 감축 계획
현지화: 미국 FTZ 활용 계획 수립, 택스 엔지니어링 적용 검토, 신흥시장 진출 전략, 현지 생산 시설 투자 계획
디지털 역량: 데이터 거버넌스 체계 확립, 디지털 무역 채널 개발, AI 컴플라이언스 자동화, 비대면 수출 플랫폼 구축
WTO 분석에 따르면 다자무역체제 붕괴는 개발도상국 교역을 33% 감소시키고 GDP의 5%를 영구 손실시킬 수 있다. 자유무역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그 언어가 ‘관세’에서 ‘안보’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제 무역의 성공은 비용 절감이 아니라 ‘리스크 통찰(Risk Insight)’에서 나온다. CEO는 단기적 비용 절감에서 벗어나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고 기회로 전환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5대 스마트 전략으로 이 위기를 글로벌 가치 사슬 내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는 도약의 기회로 전환해야 한다.
이석문 관세무역전략연구원 원장(전 서울세관장)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