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SS와 글래스 루이스는 급진적이고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의제를 미국 기업에 강요하고 있다.”
지난 12월 11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의 일부다. 이 행정명령은 프록시 자문사(Proxy Advisor)를 직접 겨냥해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및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관련 규정을 전면 재검토하고 철회할 것을 지시했다.
특히 프록시 자문사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는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와 글래스 루이스(Glass Lewis)가 명시적으로 언급됐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주주제안 규칙(Rule 14a-8) 개정과 투자자문사의 수탁자 의무에 ESG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위반에 해당하는지 검토하라는 지시도 포함됐다.
트럼프 정부 반(反)ESG 정책 기조의 정점
이번 행정명령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일관된 반(反)ESG 정책 기조가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취임 직후인 1월에는 파리기후변화협약 두 번째 탈퇴를 선언했고, 2월에는 SEC가 기후 공시 규칙에 대한 법적 방어를 중단했다.
마크 우에다 SEC 대행 의장은 이 규칙을 “비용이 많이 들고 불필요하게 침해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3월에는 SEC가 제8순회 연방항소법원에 “기후 공시 규칙 방어를 공식 종료한다”고 통보했고, 6월에는 그린워싱 방지 규칙 초안마저 철회됐다. 연방준비제도(Fed), 통화감독청(OCC),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 미국의 3대 금융 규제기관도 모두 NGFS(녹색금융 네트워크)에서 탈퇴했다. 미국 내 ESG 관련 규제 인프라가 사실상 해체된 셈이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펀드 자금 흐름에 그대로 반영됐다. 모닝스타에 따르면 미국 ESG 펀드는 2025년 3분기에만 51억 달러가 유출되며 12분기 연속 자금 유출을 기록했다. 2022년 4분기부터 시작된 이 유출 행진은 트럼프 당선 이후 가속화됐다. 3분기에만 35개 ESG 펀드가 청산됐고, 블랙록은 4개 펀드를 폐쇄했다. ‘파르나서스 코어 에쿼티(Parnassus Core Equity)’ 펀드에서는 단일 펀드 기준으로 13억 달러가 빠져나갔다. 반ESG 역풍 속에서 운용사들은 ESG 관련 마케팅을 대폭 축소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ESG’라는 단어 자체가 정치적 지뢰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등장한다. 자금 유출에도 불구하고 미국 ESG 펀드 자산은 3670억 달러로, 2021년 피크 수준을 회복했다. 시장 상승이 유출을 상쇄한 것이다. 더 주목할 점은 수익률이다. 2025년 들어 재생에너지 섹터는 뚜렷한 반등을 보이고 있다. 모닝스타 글로벌 재생에너지 지수는 연초 대비 21% 상승하며, 글로벌시장 지수(18.6%)와 전통 에너지 지수(11.5%)를 모두 앞질렀다.
위즈덤트리 재생 가능 에너지 ETF는 55% 이상 급등했고, 블랙록의 BGF 서스테이너블 에너지 A2도 24.5% 상승했다. 4년간 고금리와 공급망 차질로 부진했던 재생에너지 섹터가 금리 인하 사이클과 함께 반등한 것이다.

반ESG 정책보다 재무적 신호 주목해야
투자자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 소음이 아니라 재무적 신호다. 반ESG 정책은 ESG 펀드의 자금 흐름에는 영향을 미쳤지만, 기후 기술과 재생에너지의 펀더멘털을 바꾸지는 못했다. 오히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촉발된 미국 내 청정에너지 투자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이니셔티브 탈퇴에도 불구하고 1조 달러 이상의 지속가능 전환 투자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레이블’은 버리되 ‘투자’는 계속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린허싱(Greenhushing)’의 본질이다.
연방정부의 규제 후퇴에도 불구하고 주(州) 단위 규제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SB 253과 SB 261은 예정대로 2026년에 시행된다. 이 법안은 매출 10억 달러 이상 기업에 대해 스코프 3(총외부배출량)까지 공시하도록 의무화하며, 이 법은 상장 여부와 관계없이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모든 대기업에 적용된다.
세계 4위 경제 규모의 캘리포니아가 독자 행보를 이어가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연방법이 아닌 캘리포니아의 법에 맞춰 ESG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 해체는 ESG의 종말이 아닌 ‘규제 분화’를 초래한 셈이다.
2026년 ESG 투자 전망은 어떨까? 단기적으로 미국 ESG 펀드의 자금 유출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수익률 관점에서 기후 기술과 청정에너지 섹터의 상대 성과는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 금리인하 사이클이 본격화되면 자본집약적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의 경제성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전력 수요도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투자를 견인할 것이다. 아마존,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의 SMR(소형모듈원전) 투자는 이미 수십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
지금 ESG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소음과 재무적 신호를 구분하는 안목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ESG 정책은 펀드 흐름에 영향을 미쳤지만, 에너지 전환과 기후 기술의 장기투자 테마를 바꾸지는 못했다. 모닝스타의 분석처럼 미국 ESG 펀드 자산이 유출 속에서도 피크 수준을 회복한 것은 시장이 이미 레이블이 아닌 ‘성과’를 보고 있다는 증거다. ESG라는 단어가 사라져도 기후 기술 투자 기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난 지금이 진정한 가치를 발굴할 적기일 수 있다.
김준섭 KB증권 ESG리서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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