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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원 오가는 국제중재, 최고의 스토리가 이긴다 [한민오의 국제중재 프리즘]

입력 2025-12-23 07:00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바야흐로 스토리텔링의 시대다. 비단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소녀 가수가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된다는 스토리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도, 휴대 전화를 판매하는 직원이 세일즈할 때도, 치열하게 협상하다가 큰 거래를 성사할 때도 모두 스토리가 동원된다.
스토리텔링은 과학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이야기 형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점은 뇌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모든 사람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정보를 접하고 산다. 이때 모든 외부 자극을 뇌에서 처리하고 저장해야 한다면, 인간의 뇌는 과부하가 걸린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소한 정보를 뇌에서 저장해야 하면, 정작 중요한 내용은 우리 뇌가 놓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뇌는 중요한 정보 위주로 저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저장할 가치가 있는 중요 정보를 판별하는 문지기가 뇌 안의 '해마'다. 동물 해마를 닮은 이 부위는 맥락적 정보를 좋아한다. 즉 '언제(시간)' '어디서(공간)' 일어난 일인지, 그 일은 '누가(사람)' 했는지 맥락이 있어야 정보를 저장하려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저장하지 않고 날려버린다고 한다.



여기서 정보에 시간, 장소를 입히면 바로 이야기가 된다. 즉 정보를 스토리 형태로 전달해야만 우리 해마가 '이 정보는 중요한 정보이니, 저장할만하다'라고 판별한다. 듣는 사람에게 나의 말을 각인시키려면 이야기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과학이다.

재판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송무 변호사도 변론할 때 스토리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변론을 영어로 할 뿐, 송무 변호사의 일종인 국제중재 변호사도 결국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스토리를 구성할까 골몰한다. 이럴 때 오페라, 뮤지컬, 드라마와 같이 이미 널리 소비되고 있는 문화 콘텐츠들을 엿보면 국제중재 변론에 접목할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국제중재 심리기일의 '무대' 세팅

국제중재 절차는 평균 2년 정도 소요된다. 하이라이트는 절차 후반에 열리는 중재 심리기일이다. 1주일간 진행되기도 하고, 2주 넘게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진행될까. 첫날은 양쪽이 모두진술(oral opening)을 약 2시간씩 한다. 신청인(원고) 변호사가 전체 스토리를 먼저 발표한다. 어떻게 하면 스토리를 가장 짜임새 있고 몰입감 있게 구성할지 사전에 고심하는데,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신청인 변호사가 모두진술을 마치면, 피신청인(피고) 변호사가 반격에 나선다. 이쪽도 2시간 정도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분명히 같은 사실관계를 가지고 스토리를 풀어나가는데, 전혀 다르게 엮어간다. 신청인 이야기에는 여러 허점이 있다며 반격하기도 하고, 피신청인 입장이 상식에 더 부합한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심리기일 둘째 날부터는 사실 증인(fact witness)들에 대한 반대신문이 진행된다. 신청인 측 증인들에 대한 반대신문을 먼저 진행한 후 피신청인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이 이뤄진다(보통 각각 하루 이틀이 걸린다). 반대신문 때 변호사는 증인들이 미리 낸 증인진술서를 가지고 '이 부분은 문서와 앞뒤가 안 맞네요', '이 부분은 기억이 흐릿하지요?', '이 내용은 아무 근거가 없네요' 식으로 증인을 몰아붙인다.



얼핏 보면 반대신문이란 증인에게 여러 질문을 한 다음 답변을 듣는 시간인 것 같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조차도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다. 중재판정부가 주목했으면 하는 문서들을 나의 질문에 끼워 넣게 되고, 이를 통해 판정부도 자연스레 그 문서들을 같이 살펴보도록 반대신문을 설계한다. 궁극적으로 판정부도 내 스토리 라인에 스며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실 증인들에 대한 반대신문이 끝나면, 양쪽의 전문가 증인(expert witness)들에 대한 반대신문이 진행된다. 전문가들이 제출한 의견서에 대해 질문을 하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이때도 역시 변호사들이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내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번에는 증인석에 앉아 있는 전문가를 통해서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국제중재 심리기일에서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여러 버전으로 펼쳐진다고 보면 된다. 변호사가 입으로 한 번, 반대신문 때 상대편 사실 증인을 통해 한 번, 또 상대편 전문가를 통해 다시 한번 우리가 하고 싶은 메시지가 판정부에 전달된다. 그 후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제시한 쪽이 승자가 되는 게임이 국제중재다.
서곡 ? 테마 제시와 프레이밍으로 승기를 잡아라

중재 심리기일에서 다루어지는 쟁점은 수십 개가 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다. 핵심 주제 없이 횡설수설만 하면, 판정부가 갈피를 못 잡고 길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대리인, 그래서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한마디로 무엇인가요?'라고 했을 때 준비된 답변이 있어야 한다. 이 질문을 받지 않더라도, 판정부에 우리 입장을 간명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의뢰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리기일 초반에 '헤드라인'을 잘 제시해야 한다.

대부분의 오페라는 시작할 때 주제 멜로디를 선보이는 서곡이 있다. 참고로 중재에서 모두진술을 'opening'이라고 하는데, 오페라 서곡을 의미하는 'overture'는 'opening'을 뜻하는 프랑스어 'ouverture'에서 유래했다. 재밌는 것은 오페라 서곡도 완성도가 높은 게 많아서, 그 자체로 인기를 많이 끈 곡들도 많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서곡, 비제의 '카르멘' 서곡,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 등이다.



몇 년 전 매수인을 대리했던 중재 사건에서의 일이다. 상대방 변호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사건은 매수인의 단순 변심에서 비롯됐습니다. 매수인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번 구입한 물건을 물릴 수는 없습니다."

듣자 하니 그럴싸한 프레이밍이었다. 강하게 반격할만한 한마디가 필요했다.

"물건을 샀는데, 포장을 열어보니 다 썩어 있었습니다. 그 물건은 반품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중재인이 우리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의뢰인이 100% 승소했다.
지루하면 끝 - TV 드라마 길이로 소분하라

중재 심리기일은 오전에 3시간, 오후에 3시간 진행되곤 한다. 오전 세션은 1교시와 2교시로 나뉘는데, 1교시를 75분이나 90분 진행한 다음, 15분씩 커피 브레이크를 가진다. 속기사가 중간에 15분씩 쉬어야 한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다. 사실 판정부도 변호사들도 모두 중간에 휴식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다 보니 반대신문이 한창 진행되다가 중간에 호흡이 끊기는 수가 있다.

국제중재 변호사는 그 점을 감안해 반대신문 스크립트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즉 75분에서 90분 정도 몰입해서 다룰만한 주제를 하나 고르고, 그 시간에 맞춰 질문을 준비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워낙 일일연속극이나 드라마에 익숙한지라, 30분짜리 스토리도 재밌게 만드는 데 도가 텄다. 전체 줄거리도 재밌어야 하지만, 매회 자그마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한국 변호사에게는 이처럼 이야기를 소분해서 포장하는 게 생소하지 않다.

몇 년 전 조단위 사건에서 상대방 손해산정 전문가로 선임된 회계사를 반대 신문한 적이 있다. 이 회계사는 중재 심리기일에서 증언을 처음 해보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긴장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의욕이 넘쳐서인지 '오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수록 필자는 반대신문을 할 때 그 회계사를 몰아붙이지 않고, 차근차근 회계사 의견의 허점들을 짚었다.



90분이 거의 끝난 시점, 회계사가 다소 돌발적인 발언을 했다.

"이야~ 중재 심리기일이란 게 아주 재미있네요. 오늘 밤새도록 끝장토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질문은 무엇이죠?"

심리기일에서 전문가 증언은 재미로 하는 게 아닌데, 정말 재미가 붙었는지 그는 쓸데없이 오버를 해버렸다. 판정부도 '이건 무슨 상황이지?'하는 표정을 지었고, 필자도 마침 더 할 질문이 없었다.

"회계사님, 실망하게 해드려 어떡하죠. 방금 질문이 마지막 질문이었습니다."

회계사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판정부는 순간 긴장이 풀려서인지 소리 내 웃었다. 의장중재인이 커피나 한잔 먹자고 휴식을 청했다. 의뢰인이 커피를 마시며 "마무리가 좋았다"고 한 격려 한 마디에 힘이 났다.
한국인은 스토리텔링에 강하다

국제중재 변호사로서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영어로 변론해야 하는 직업인데, 한국인으로서 어렵지 않냐는 것이다. 물론 영어 변론으로 상대방 영국 변호사나 미국 변호사와 대적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한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해학과 풍자에 일가견이 있다. 한국인들의 '드립(ad-lib)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본다.

영화 '기생충'에는 영어 한마디 안 나온다. 그런데도 전 세계가 열광했다. 우리나라 윤여정 배우가 한국어로 연기를 해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한국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풀어낸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좋으면 그 누구라도 감동하고 마음이 움직인다. 입담 좋고, 이야기를 맛있게 잘 풀어내는 한국인이야말로 국제중재 변호사로서 성공할 수 있는 DNA가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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