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가 없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보통 지난 2년을 돌아보고 미국 사회에 가장 영향이 컸던 사건이나 이슈를 골라 주제를 발전시키곤 합니다. 그러나 이번 비엔날레는 좀 다릅니다. 큐레이터인 마르셀라 게레로와 드류 소이어는 ‘관계성(Relationality)'을 키워드로 일단 작가를 먼저 만났다고 합니다. 특정한 주제를 놓고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를 먼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작가를 소개받는 방식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수개월 동안 300회가 넘는 스튜디오 방문의 결과, 비엔날레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마치 거미줄처럼 소개와 소개로 이어지는 작가들 사이의 연결망은 ‘작가의 작가’를 전시장에 데리고 옵니다. 덕분에 비엔날레 단골들이 아니라 뉴 페이스들이 많이 보입니다. 연약하고 개인적인 네트워크로 인해 작품들 사이 상관관계를 읽어내기가 쉽진 않습니다. 비슷한 담론을 공유하는 작가들이 아니기에 온갖 이야기들이 튀어나옵니다. 기후 변화, 국경 단속, 첨단기술의 지배, 노동문제 등 현대사회의 불안함을 토로하는 한편 무관심한 개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을 주는 관계성까지 극단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전혀 다른 스토리가 펼쳐지지요. 이를 통해 작가들이 지금 느끼는 ‘미국’을, 현존하는 미국 그 자체를 담아내려 했다는 것이 큐레이터들의 설명입니다.
‘미국 미술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이후 250년간 이어져 왔습니다. 국가정체성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니까요. 휘트니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생산지를 기준으로 피아를 나누는 트럼프의 관세 규정과 달리, 휘트니는 신자유주의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작업과 작가도 포함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일본, 필리핀, 베트남, 이란 등 역사적으로 미국이 정치에 개입하거나 점령했던 국가의 작가들이 참여했죠.) 이그나시오 가티카의 영상 ‘샌하탄(Sanhattan, 2025)은 맨해튼을 모델로 한 페루의 수도 산티아고 금융지구를 보여주는데, 고층 빌딩에 뉴욕 맨해튼의 랜드마크 빌딩 사진을 겹치며 세계의 기준이 되어버린 미국을 보여줍니다. 바젤 아바스와 루안느 아부-라흐메(팔레스타인 출신, 뉴욕거주)는 3채널 영상 비디오 ‘우리가 불이 되어 우리를 불태울 때까지’(Until We Became Fire and Fire Us)에서 아부-라흐메의 아버지가 4~50년 전에 그린 그림, 현재 팔레스타인의 모습이 겹쳐지며 존재했으나 존재가 사라진 그러나 기억으로 존재하는 과거와 현재를 기록합니다. 전반적으로 저항적 제스처라기보다 사실 그대로를 담담하게 담아냅니다.

정치적 거세냐 혹은 일상의 정치를 담아낸 것이냐
지난해 백악관이 스미스소니언 산하 박물관과 미술관에 전시의 기준을 제시한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미국의 인종차별, 성차별 등 차별의 역사를 인정하거나 다양한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전시를 ‘부적절한 이념’으로 규정한 것인데, 트럼프 2.0 시대에 박물관들이 자기검열을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휘트니도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지난해 5월 1968년 이후 꾸준히 진행해 온 독립연구프로그램(Independent Study Program)의 퍼포먼스를 취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친 팔레스타인 퍼포먼스가 공연 이틀 전에 취소된 것이죠. ISP 참가자와 큐레이터 등은 ‘사전검열’이라며 비판했고 미술관 측은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과거 다른 행사에서 선보인 퍼포먼스의 도입 부분에 한 혐오 발언과 폭력적 이미지의 미화가 박물관의 가이드라인에 저촉된다며 ‘무관용’ 정책으로 취소했다고 맞섰습니다. 현재는 ISP 프로그램 자체가 (프로그램 디렉터의 부재 등의 이유로) 중단된 상황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이번 비엔날레에선 날카로운 정치적 구호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전체 56명 중 여성 작가가 전체의 절반이 넘고 퀴어 작가가 전체의 30%에 달합니다. 미국 내에서 대표적 소수자로 꼽히는 네이티브 아메리칸 작가도 5명이나 되죠. 트럼프 2.0 시대에 반해 작가의 다양성은 확보했을지 모르나 작품에서는 첨예함보다는 모호함이 앞섭니다. 2024년 네온 조형물에 ‘Free Palestine’을 몰래 넣어 파장을 일으켰던 데미안 디네 야지와 같은 작업은 없습니다. 대신 (어떤 면에선) 더 급진적이지만 정치적 당파성은 덜한 주제가 많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자연 파괴, 신자유주의 이후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대량 학살 등이 그 예시입니다.
이번 비엔날레의 가장 상징적 작품으로 꼽히는 켈리 아카시의 ‘모뉴먼트(알타데나)’는 지난해 로스앤젤레스 알타데나 지역을 휩쓴 화재로 작가의 집이 불타 사라지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굴뚝을 유리로 제작했습니다. 5층 야외 테라스에 자리한 작업은 현대커미션으로 완성했는데, 전소된 집-수 십 년간의 기억이 담긴-에 대한 추모비이자 점점 빈도가 잦아지는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르셀라 큐레이터는 도록에 기재한 ‘Creatures Akin’(친족 생명체) 에세이에서 “(멸망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현재를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예외주의에 대한 모든 허세를 버리고, 동일하거나 더 심각한 멸종위기에 직면한 동물, 식물, 그리고 다른 종류의 ‘친족’들과 함께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상상할 기회를 창출한다”며 “혈연으로 묶인 존재이든 단순히 닮은 존재이든 온갖 종류의 유한한 생명체들에게 주목하는 예술의 창조적 잠재력을 강조하고 싶다”고 설명합니다.
귀여움은 나의 무기
올해 휘트니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귀여움’입니다. 귀여움은 상대방을 쉽게 무장해제 시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갖게 만들죠. 어려운 현대미술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작업은 콩 장난감입니다. 고시오 작가의 ‘콩 플레이’(2024)는 땅콩버터 같은 간식을 채워 강아지들이 주로 가지고 노는 장난감 ‘콩’을 도자기로 제작했습니다. 작고 알록달록한 조형물은 호기심을 자아냅니다. 전시장 벽엔 강아지와 즐거운 한때를 넘어 교류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주인과 반려견의 스케치는 애잔한 마음마저 들게 합니다. “나는 ‘런던’(반려견 이름)을 어떤 면에서는 내 딸이자, 배우자이자, 어머니로 생각하며, 때로는 그 역할들이 뒤바뀌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위계 구조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자, 나 또한 동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작가 인터뷰)

그리고 때로는 귀여움 뒤에 기괴함과 섬뜩함이 숨어 있습니다. 쉽게 다가갔다가 느껴지는 간극이 좀 더 충격적이죠. 프레셔스 오코요몬은 토끼 인형의 머리와 흑인 인형의 몸통에 날개를 달았습니다. (You have got to sometimes become the medicine you want to take, 2025) 귀여움과 기괴함이 섞인 이 인형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창조물입니다. 말콤 피콕은 인조 머리카락으로 거대한 삼나무 둥치(Five of them were hers and she carved shelters with windows into the backs of their skulls, 2024)를 만들었습니다. 나무에 숨기듯 부착된 스피커에서는 가족, 친구와 나누는 대화가 재생됩니다. 하와이 출신 작가 그룹인 케가히 와히는 다이어리 꾸미는 데 쓸 법한 하트와 스티커가 화면 곳곳에 터져 나오는 에어로빅 운동 영상을 선보입니다.
갓난아기가 웅크리고 잠든 듯한 밀랍 조각은 (안드레아 프레이저, Untitled (Object) IV, 2024) 푸에르토리코 출신 카르멘 데 몬테 플로레스의 인물화(Four Women (1969), Man and Woman Sitting (1968)) 앞에 놓였는데 두 작가는 모녀 관계입니다. 성인 인물화와 신생아 조각은 모녀 관계를 그대로 인용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만, 조각을 오래 보고 있으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느낌이 들어 상당한 거리감과 긴장감을 줍니다.




확실히 이번 비엔날레는 촌철살인의 미덕은 없습니다. 어떠한 자극에도 쉽게 변하지 않고 조용한 미국 사회를 그대로 담아낸 듯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대미술에 무엇을 기대할까요?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을 비판하고 꼬집어내는 역할? 아니면 전혀 다른 상상력? 제가 생각하는 동시대 미술의 덕목은 변화의 추동력입니다. 미술은 정치와 아주 동떨어진 영역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시대정신과 떨어져서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일제 시대 한국 작가들과 군부독재시기 한국현대미술 작가를 떠올려 보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시선으로 필터링하고 소화해 시대정신을 담아낸 작업들만이 오랜 생명력을 얻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2026년의 휘트니 비엔날레는 재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도록을 보면 작가가 추천한 작가들이기에 두 명의 작가가 나눈 이야기가 인터뷰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관계는 실낱같고 거미줄처럼 유약합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빈부격차와 인종차별과 3차 세계대전의 위협에 비하면요. 다만 한가지 희망은 우리 모두가 이 같은 연약한 관계망에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전시는 8월 23일까지, 특별 행사는 5월 프리즈 뉴욕 기간에 주로 열립니다.
이한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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