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사람답게 죽음을 맞는 길

입력 2026-05-17 18:21   수정 2026-05-18 00:15

얼마 전 조력사(assisted dying)를 위해 스위스로 가려던 사람이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폐섬유증을 앓는 60대 남성이었는데, 유서를 발견한 가족이 경찰에 신고했다. 폐 질환은 숨쉬기가 어려우니, 사정이 딱하다.

조력사는 ‘자신이 선택한 시기와 방식으로 의료적 도움을 받아 죽을 권리’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불치병을 앓아 삶이 얼마 남지 않았고, 정신은 맑아 판단 능력이 있고, 자발적으로 여러 번 죽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경우라면 그런 권리를 지닌다는 얘기다. 현재 스물 남짓한 나라에서 조력사를 허용한다. 스위스를 비롯한 몇몇 나라는 비거주자의 조력사도 허용한다. 조력사를 희망하는 사람은 많지만 허용하는 나라가 적은 것은 자살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연명의료 거부도 ‘죽을 권리’에서 나온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괴롭게 견디다 죽는 사람의 모습이 널리 알려진 덕분에 조력사보다는 거부감이 훨씬 약하다. 65세를 넘은 사람의 84.1%가 연명의료 중단을 원한다는 조사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중단된 경우는 16.7%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당사자의 고통만이 아니라 사회적 낭비를 뜻한다.

이런 사정은 대체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병약한 노인이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상황에선 심각한 위협이 자란다. 이 위협의 한 부분은 ‘항생제 내성 병원체(super bug)’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연명치료는 어쩔 수 없이 항생제 다량 사용으로 이어진다.

결국 늙음이 문제의 근원이다. 늙음은 유성생식의 속성이니 개체의 몸은 자식을 낳아 기를 만큼 튼튼하면 된다. 그보다 더 튼튼하면 자식에게로 갈 자원을 낭비하는 셈이다.

이런 사정은 ‘병원체와의 공진화(coevolution)’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 몸은 병원체를 막아내기 위해 빠르게 진화한다. 물론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도 우리의 방어 메커니즘을 뚫을 수 있도록 진화한다. 이른바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 hypothesis)’이다. 이 표현은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열심히 달려야 겨우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며 쉬지 않고 달리는 여왕의 말에서 나왔다. 병원체가 우리 몸에 오래 머물면 이들의 감염 능력이 커진다. 그런 가능성을 줄이려고 각 개체는 자식을 낳아 키우고 나면 바로 늙도록 진화했다.

자연히 병약한 노인이 연명의료를 받으면 독성이 큰 병원균이 나타난다. 이 점은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역질에서 극적으로 증명됐다. 영국에서 한 70대 남성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집에서 한 달 동안 지내고도 낫지 않아 케임브리지대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그는 면역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의료진은 항바이러스 치료제를 처방했지만 그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이에 의료진은 회복기 혈장(convalescent plasma) 치료를 결정했다. 감염에서 회복한 환자 혈장엔 병원체 항체가 포함돼 치료 효과가 있다. 회복기 혈장 치료를 받았어도 그 환자는 회복하지 못했고 처음 양성 반응을 보인 지 102일 만에 죽었다.

그의 조직 표본을 조사한 의료진은 깜짝 놀랐다. 혈장 치료를 받은 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빠르게 진화해 항체에 저항하는 새로운 능력을 갖춘 것이다. 즉 면역력이 약해져 병원체를 물리칠 힘은 없지만 만성 환자로 살아가는 노인은 바이러스가 빠르게 진화하는 온상이 된다.

이런 사실은 조력사와 연명의료 거부 허용이 합리적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런 조치는 개인 차원에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줄이고 사람답게 죽음을 맞도록 돕는다. 또 사회적 차원에서 자원 낭비를 줄이고 병원체 진화를 억제한다. 지금 많은 변이를 지닌 코로나19 바이러스 변종 BA.3.2. ‘시카다’(cicada)가 갑자기 나타나 인류와 병원체 사이의 공진화를 새삼 일깨워준다.

마침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연명의료 중단을 종전 ‘임종기’에서 ‘말기’로 앞당기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조력사를 허용하는 방안도 함께 논의되기를 기대해본다.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삼성바이오로직스현대차삼성전자트럼프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