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과 미술관으로 떠난 안은미…감각의 민주화란 이런 것!

입력 2026-06-02 08:48   수정 2026-06-02 11:10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작업은 공연이라는 언어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세운 성과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설치미술, 그리고 리움미술관의 공공 프로젝트는 무용이 어떻게 총체 예술로 진화하는지 증명한다. 관객과 참여자, 과거와 현재가 굿이라는 제의적 형식을 통해 하나로 결속되는 안은미식 ‘감각의 민주화’ 현장을 가봤다.

지난 5월 18일, 형광색 조명이 리움미술관 로비를 입체적으로 물들이는 가운데 여성들이 대리석 바닥 위를 저마다의 리듬으로 천천히 가로질렀다. 70세 안팎, 20명 남짓한 오늘의 춤꾼 중 누군가는 “(춤추기 전까진) 죽을 날만 기다렸다”고 했다. “70년 만에 내 안의 날개를 발견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안무가 안은미가 요즘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더 이상 ‘무용’이라는 범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미술관과 광장, 전시장과 커뮤니티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그는 동시대 한국 예술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관계를 생성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광장 위에 새겨진 몸의 기록, ‘산다선다굿굿’

지난달 14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광장에서는 전시 <코스모 아시아 피플전>의 개막 퍼포먼스 ‘산다선다굿굿’이 펼쳐졌다. 이 작업은 안은미가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핑키핑키굿’의 연장선으로, 굿을 민속적 재현이 아닌 관객과 공간, 신체가 동시에 관계를 맺는 ‘상황 특정적 상호조우체’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공연은 전시장 내부에서 안은미의 굿패가 등장하며 시작해 광장으로 확장됐다. 광장 바닥에 펼쳐진 광목천은 아직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시간의 표면을 상징했다. 커다란 붓에 보라색 물감을 묻히고, 이를 광목천에 내려치면서 안은미를 비롯한 ‘전달-매개자’들의 몸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그들이 지나가며 천 위에 흘린 흔적들은 과거의 역사와 몸의 움직임이 남긴 물질적 증거처럼 층층이 쌓였다. 마지막 단계에서 이 천을 말아 세우자, 집합적 흔적과 움직임이 응축된 거대한 ‘피플People’의 형상이 수직으로 우뚝 섰다. 이때 아시아문화광장을 가득 채운 연막은 시야와 경계를 흐리며 공간의 위계를 느슨하게 만들었고, 관객과 무용수는 비로소 하나의 집합적 상태로 결속됐다.



안은미가 차려낸 예술의 제단

안은미는 202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도 자신의 경계 없는 예술 세계를 선보였다. 당시 베네치아의 무인도(산 자코모섬)에서 안은미는 핑크빛 연무와 함께 ‘핑키핑키 굿’을 보여주는 동시에 섬 내 거대한 창고 홀에 1만36개의 인형 조각을 전시해 명실공히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전통 굿에서 사용하는 종이돈 ‘지전’과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 ‘꼭두’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이 인형들은 이름 없이 사라져간 과거의 영혼들을 현재로 소환해 축복하는 거대한 집단적 기념비였다. 무용수의 몸이 부재한 공간에서도 이 나무 인형들은 각기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이는 안은미의 작업이 신체의 움직임을 넘어 물질과 설치, 그리고 역사적 서사가 결합된 ‘총체 예술’로 진화했음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올해 광주 ACC에서 전시한 ‘동방곡곡차이사이밥상’에서도 그의 작가주의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아시아 7개국의 유물 62점을 활용한 설치미술인데, 아시아를 상징하는 다양한 요소를 철제 쟁반 위에 장식하고 밥상과 같은 제단을 풍성한 오브제로 가득 채웠다.

시니어의 몸, 20세기를 통과해온 ‘기록된 장소’

안은미의 시선은 다시 미술관 안으로 향했다. 지난 5월 18일 리움미술관 로비에서 열린 시니어 무용 프로젝트 ‘둥실덩실’은 평균연령 70세가 넘는 여성 참가자 20명이 주인공이었다. 안은미에게 시니어의 몸은 단순한 노화의 대상이 아니라, 20세기의 격동하는 시간을 온전히 통과해온 하나의 ‘기록된 장소’다. 노동의 방식과 관계의 구조, 시대마다 다른 감각의 리듬이 중첩된 이들의 몸 자체가 곧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리움미술관은 이번 프로젝트를 사회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중동태middle voice’ 개념과 연결해 설명한다. 행위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미술관 의 새로운 공공성을 탐색하겠다는 취지다. “미술관은 더 이상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선언처럼 ‘둥실덩실’은 완성된 안무의 재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들이 충돌하며 생성되는 ‘날것의 몸짓’ 그 자체를 추구했다. 리움미술관은 이날만큼은 왁자지껄한 파티장이나 다름없었다.

“못하면 어때”... 춤으로 터널을 빠져나온 우주들

참가자들에게 이번 여정은 자신을 억눌러온 고정관념에서 해방되는 과정이었다. “춤은 몸으로 하는 자기표현”이라는 안무가의 말에 따라, 이들은 트로트부터 아이돌 음악, 그리고 1980년대 젊은 날을 적시던 메탈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실수하지 않고 버텨야 했던 지난날의 습관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박자를 놓쳐도, 못해도 괜찮다”는 허용 속에서 참가자들의 표정은 점차 밝아졌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로 메이크업을 하고 로비를 종횡무진하는 이들의 모습은 원래 춤을 추던 사람처럼 당당했다. 이들은 황진이부터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자신들에게 영감을 준 여성들을 떠올려달라며, 관객에게 자신들의 무대를 즐겨달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안은미는 그들을 “언니들”이라고 계속 불렀다. 언니들은 “우리들의 몸에 너무 몰랐고, 무례했다”며 “미안하다, 내 몸아!”를 연신 외쳤다.

안은미는 전문 무용수의 화려한 기교보다 평범한 개인의 몸 안에 숨겨진 ‘흥’의 발화점을 건드리는 사람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정형화된 극장만이 아니다. 무인도, 미술관 로비, 그리고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광주까지. 안은미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상태에 집중하고 그때 모인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안은미의 시도는 감각의 민주화로 정의할 수도 있겠다. 관객과 참여자, 무용과 설치미술, 공연과 전시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그의 예술적 실루엣은 그가 사랑하는 핑크색처럼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각인되고 있다.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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