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훌륭한 ‘검색기’ 정도로 일상에 스며들었던 인공지능(AI)이 점점 똑똑해지면서 조직의 일을 도와주는 ‘동료’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AI를 잘 활용해 내 일을 줄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반복 업무는 AI가 처리하고 사람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니, 일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바빠진 것 같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 AI를 제대로 쓰지 못해서일까? 아니다. AI와 함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AI가 준 결과물을 판단하고, 수정하고, 또 다음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인지적 부담을 겪는다. 나를 돕기 위해 쓰는 도구가 더 힘들게 만드는 상황, 피할 수 없는 AI와 ‘건강’하게 공존하려면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
AI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 중 하나가 ‘속도’다. 엄청난 데이터를 바탕으로 ‘순식간’에 내용을 편집해 사용자에게 제공한다. 이 속도가 인간을 지치게 한다. 사람은 문제를 마주하면 먼저 ‘고민’을 한다. 주변 환경도 파악하고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을지도 찾는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 없나 자료를 찾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괜찮은 대안이 무엇일지를 자연스럽게 고민한다. 그런데 AI는 이 시간을 ‘몇 초’로 줄여버렸다. 이를 따라가려다 보니 뇌가 과부하 걸리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를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UC리버사이드 공동 연구팀은 ‘브레인 프라이(Brain Fry)’라고 이름 붙였다. 미국 직장인 1488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AI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의 14%가 두통이나 느려진 의사결정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마케팅, 소프트웨어 개발, HR, 금융처럼 여러 AI 도구를 동시에 다루는 직군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AI가 우리의 뇌를 ‘태우고(fry)’ 있다는 무서운 결과다.
이것만큼 무서운 게 또 있다. AI 모델이 발전하면서 답변을 제시한 다음 자연스럽게 ‘꼬리 질문’을 덧붙인다. 경제 동향 자료를 분석한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엔 내가 질문한 카테고리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준다. 그러다 ‘다른 국가와의 비교치를 더 알아볼까요’, ‘과거 10년의 추이를 분석해 볼까요’와 같을 질문으로 자료의 구체성을 높이려 하거나 좀 더 깊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한 질문을 덧붙인다.
사용자 입장에선 생각지 못한 해석이라 ‘아하!’라는 생각을 하며 AI가 제안하는 질문에 따라 자료를 확장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차!’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생각의 주인이 내가 아닌 AI가 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의도적 멈춤’이다. 2014년부터 시작된 희한한 대회가 있다. 바로 ‘멍때리기 대회’다. 한 예술가의 참여형 퍼포먼스였는데 10년이 넘도록 국제대회도 열릴 정도로 이어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시간 낭비가 아니다’는 걸 보여주는 시도다.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에도 사치를 좀 부려보자는 의도도 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장난 아니냐’고 치부하기엔 뇌과학적으로 이건 너무 중요하다. 뇌에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영역이 있다. 외부 자극 없이 가만히 있을 때, 즉 멍때리는 동안 가장 활성화되는 회로다. 이 영역이 켜질 때 인간은 창의적 연결을 만들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엄청난 속도’의 AI를 마주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의도적으로 디폴트 모드를 만드는 것이다.
AI가 주는 아이디어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일 뿐이다. 그 안에서 ‘지금의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 이를 위해 나의 시간에 ‘빈칸’을 만들어 두면 좋겠다. 잠깐의 ‘틈’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던 수많은 생각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경험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런데 개인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충분치 않다. 조직과 리더의 변화와 지원도 필요하다. AI가 업무에 도입되면 리더들은 자연스럽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똑똑하고 빠른 AI가 지치지도 않고 24시간 쉼없이 돌아간다니 무언가 더 많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다. 그 기대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기대의 방향이다.
리더나 조직의 기대가 ‘속도’가 아닌 ‘깊이’면 좋겠다. 속도를 기대하면 구성원은 AI가 빠르게 내놓은 결과물을 검토하고, 다듬고, 또 다음 질문을 던지는 사이클에 갇힐 수밖에 없다. 물론 산출물의 양은 늘어난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속도가 강조되는 조직일수록 구성원은 더 바빠지고 더 얕아진다.
디지털 기술이 장악한 사회에서 집중력과 몰입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칼 뉴포트 교수는 저서 ‘딥 워크(Deep Work)’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의가 분산된 시대에 깊이 집중하는 능력은 희소해지고 동시에 더욱 가치 있어진다.”
AI가 정보의 양을 폭발적으로 늘린 지금, 그 정보를 깊이 있게 소화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더욱더 귀해진 셈이다.
그래서 AI 시대에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리더라면 지금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묻기 전에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해결하려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제대로 된 질문을 만들어낼 역량을 키우고 있는가’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간을 조직이 기꺼이 허용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면 좋겠다.
두 구성원이 똑같이 AI를 썼다고 하는데 결과물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던 경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이건 AI 활용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가 핵심이다.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AI와의 대화는 정교해지고 산출물의 수준은 높아진다. 그러니 구성원들에게 깊이를 요구하는 조직이 많아지면 좋겠다. 충분히 고민할 시간, 그리고 멍때리는 데 시간을 쓰더라도 ‘방법’을 찾아내는 데는 ‘속도왕’ AI를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방향이 잘못된 속도는 잘못된 곳에 더 빨리 도착할 뿐이다. AI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AI보다 빠르게 답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AI가 제대로 된 방향의 고민을 하게끔, 답변에 깊이가 있게끔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멈출 줄 아는 사람에게서 길러진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인간다운 능력은 어쩌면 이것일지 모른다. 잠시 화면을 닫고, 생각을 내려 놓고,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물어보자.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AI 시대의 진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김한솔 HSG휴먼솔루션그룹 조직갈등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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