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 중 하나였던 영국의 현대미술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가 12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호크니 측 관계자는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20~21세기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호크니가 자택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국내 미술 애호가들에게 ‘수영장 그림’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37년 영국 북부의 공업도시 브래드퍼드에서 노동자 가정의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스무 살이던 1957년 지역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판매한 그림의 가격은 10파운드(약 2만원)였다. 61년 뒤 그의 그림 한 점에는 9030만달러(약 1374억원)의 가격표가 붙게 된다.
1959년 입학한 런던 왕립예술대학(RCA)에서 그는 일찌감치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여성 모델을 그리라는 과제를 거부하고 미국 보디빌딩 잡지에 실린 근육질 남성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동성애가 범죄로 취급받던 시절, 그는 '함께 부둥켜안은 우리 두 소년'(1961) 등 작품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담았다. 졸업에 필요한 논문도 "화가는 그림으로만 평가받아야 한다"며 내지 않았다. 학교는 결국 호크니에게 졸업장을 주기 위해 규정을 고쳤다.

1960년대, 탈색한 금발 머리에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고 담배를 입에 문 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사교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대표작 '더 큰 첨벙'(1967)은 이 시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탄생했다. 방금 누군가 다이빙대를 박차고 뛰어든 것처럼, 공중으로 솟구친 채 화면에 멈춘 물보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물을 멈춰 있는 그림에 담으려 한 호크니의 실험이 담긴 작품이다.
분홍 재킷을 입은 남자가 물속을 헤엄치는 남자를 내려다보는 '예술가의 초상'(1972)은 2018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030만달러에 낙찰됐다. 당시 생존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이었다.

호크니는 평생 새로운 화풍을 추구했다. 1980년대에는 폴라로이드 사진 수십 장을 이어 붙인 콜라주를 통해 원근법, 그리고 인간이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의 한계를 시험했다. 오페라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하는가 하면 복사기와 팩스로 작품을 찍어내기도 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이패드로 작품을 그리는 등 신기술에도 열려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그림을 만드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
한국과의 인연도 있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아시아 첫 대규모 개인전에는 약 30만 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2023년에는 그가 3년간 직접 제작에 참여한 몰입형 미디어아트 '비거 앤 클로저'가 서울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 걸렸다.
말년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2012년 뇌졸중을 겪고도 작업을 이어갔고, 2017년 테이트브리튼에서 시작해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으로 이어진 대규모 회고전으로 건재함을 알렸다. 2019년에는 프랑스 노르망디 시골로 거처를 옮겨 아이패드로 봄이 오는 풍경을 매일 기록했다. 지난해 파리에서 열린 회고전 '데이비드 호크니 25'(루이비통재단)는 70년 화업을 총망라한 사상 최대 규모 전시였다.
그는 평생 '거절을 잘 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1990년에는 기사 작위를 거절했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요청도 사양했다. 평생 줄담배를 피우며 영국 정부의 금연 정책을 "기괴한 사회공학"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사람들을 두고서도 "대부분의 사람은 잘 보지 않는다. 그저 걸어 다니기 위해 발 앞의 땅을 훑을 뿐이다. 나는 평생을 보는 데 썼다"고 말할 정도로 까칠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온전히 마음을 바친 건 그림뿐이었다. 2015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과거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을 산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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