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손잡은 K 테크기업…글로벌 AI 생태계 주도한다

입력 2026-06-22 17:21   수정 2026-06-22 17:52

이달 초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한국 방문은 지난해와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지난해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망을 점검하는 ‘반도체 출장’이었다면, 이번에는 인공지능(AI) 인프라부터 게임, 로보틱스, 스타트업까지 한국 산업 생태계 전반을 훑는 ‘AI 로드쇼’에 가까웠다. 4박 5일 동안 재계 총수와 인터넷·게임 업계, 정부, 스타트업을 잇따라 만나며 엔비디아가 그리는 차세대 AI 생태계의 밑그림을 한국에서 구체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삼겹살집에서 시작된 ‘AI 동맹’
방한 첫날인 지난 5일 젠슨 황은 이른바 ‘삼소(삼겹살+소주) 회동’에 나섰다. 서울 홍익대 인근 식당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만찬을 가졌다.

구 회장이 “오늘은 편안하게 친목을 다지는 자리”라고 말할 정도로 이날 모임은 격의 없는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젠슨 황은 참석자들과 폭탄주를 나누며 어깨동무를 하는 등 친밀감을 나타냈다.

식사 비용은 이해진 의장이 네이버페이의 얼굴인식 결제 서비스인 ‘페이스 사인’으로 결제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젠슨 황은 식사 도중 밖으로 나와 취재진에게 “한국에 큰 선물을 가져왔다”며 차세대 AI 플랫폼 베라루빈과 CPU 베라, AI PC 플랫폼 RTX 스파크, 로봇용 AI 컴퓨터 젯슨 토르를 직접 소개했다. 이어 “한국 비즈니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며 한국 시장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는 앞서 e스포츠 구단 T1의 베이스캠프를 방문하기도 했다. 리그오브레전드(LoL) 프로게이머인 ‘페이커’ 이상혁 선수와 T1 선수단을 만난 그는 “한국은 e스포츠에 최적화된 시장”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팬 서비스 일정으로 보였지만 업계에서는 상징성이 크다고 평가한다. 엔비디아가 AI 시대에도 게임 산업을 핵심 파트너로 보고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실제 이번 방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일정 중 하나는 국내 게임 업계 수장들과의 연쇄 회동이었다. 젠슨 황은 7일 김택진 엔씨 대표,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 등을 만나 생성형 AI와 차세대 게임 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표면적으로는 게임 사업 협력처럼 보이지만 업계는 이를 피지컬 AI 전략의 연장선으로 해석한다. 휴머노이드 로봇과 자율주행 AI가 현실 세계에 투입되기 전 가상 공간에서 수없이 반복 학습해야 하는 만큼 게임사가 보유한 3차원(3D) 물리 엔진과 시뮬레이션 기술이 필수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게임사는 이제 GPU 고객이 아니라 엔비디아 로보틱스 전략의 핵심 파트너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 네이버·SK와 AI 팩토리 구축
방한 후반부 일정은 AI 인프라 구축에 집중됐다. 8일 젠슨 황은 경기 성남 네이버 1784 사옥을 찾아 이해진 의장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열고 2028년까지 200메가와트(MW) 규모 AI 팩토리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장기적으로는 기가와트(GW)급 인프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AI 팩토리는 전기와 데이터를 투입해 AI 서비스를 생산하는 차세대 데이터센터 개념으로, 엔비디아가 미래 핵심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분야다.

네이버는 엔비디아의 글로벌 AI 모델 생태계인 ‘네모트론 연합’에도 합류했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한국을 미국 외 지역의 핵심 AI 인프라 거점으로 낙점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젠슨 황은 “네이버는 지금보다 10배 더 큰 회사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하며 협력 확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SK그룹과의 협력도 한층 확대됐다. 젠슨 황은 최태원 회장과 만나 AI 팩토리와 클라우드 인프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SK텔레콤을 중심으로 한 AI 데이터센터 사업과 엔비디아 플랫폼을 결합해 아시아 시장 공략에 나서겠다는 구상이다. 지난해까지 협력의 중심이 HBM이었다면 이제는 AI 서비스와 인프라 전반으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연구개발(R&D)센터 설립 계획도 공식화했다. 젠슨 황은 “한국에서 채용을 시작했다”며 “서울에 R&D센터를 세우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AI와 로보틱스 분야 인재 확보를 위한 거점 구축에 나선 것이다.
◇ 스타트업까지 품은 피지컬 AI 전략
방한 마지막 일정은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리셉션’이었다. 업스테이지, 노타, 위로보틱스, 에이로봇 등 AI·로봇 스타트업 18곳이 참석했다. 엔비디아는 이 자리에서 자사 AI 플랫폼과 로봇 개발 생태계를 소개하고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같은 날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의 면담도 이뤄졌다. 양측은 한국 AI 생태계 투자와 차세대 AI 인프라 구축 방안 등을 논의했다. 정부와 대기업, 스타트업을 아우르는 전방위 협력 체계를 구축하려는 엔비디아의 의지가 드러난 대목이다.

젠슨 황의 이번 방한에 대해 엔비디아가 그리는 차세대 AI 생태계 전초기지로 한국이 떠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게임 엔진, 로보틱스까지 연결하는 거대한 AI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그의 구상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테크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가 한국을 단순한 메모리 공급국이 아니라 향후 AI 시대를 함께 열 전략 거점으로 보기 시작했다”며 “이번 4박 5일은 사실상 한국 AI 생태계를 엔비디아 플랫폼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보였다”고 말했다.

유지희 기자 keep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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