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뱃고동과 '카르멘'…부산의 별명은 이제 '부체른' '부레겐츠'

입력 2026-07-13 09:24   수정 2026-07-17 10:46

바닷가 뱃고동과 '카르멘'…부산의 별명은 이제 '부체른' '부레겐츠'



"오페라에선 함부로 반지를 내던지면 큰일납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반지나 물건을 함부로 대하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것은 전 세계에 통하는 보편적 상식이다. 인류의 보편적 상식은 오페라 속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4막에서 여주인공 카르멘이 돈 호세로부터 받은 반지를 내던지는 순간 오페라는 비극으로 끝난다.

지난 11일부터 이틀간 부산 북항 랜드마크 부지 특설무대에서 야외 오페라 <카르멘>이 공연됐다. 이번 공연은 한 편의 오페라를 넘어 '한여름 밤의 축제'에 가까웠다. 푸드트럭 앞에는 긴 줄이 이어졌고, 관객들은 맥주와 와인 슬러시를 손에 들고 객석에 앉았다. 드넓은 하늘 아래 펼쳐진 야외무대를 찾은 관객은 마음도 넉넉했다. 무더위와 모기를 쫓기 위한 부채질과 손풍기 소음조차 공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이번 공연을 보러 온 국내 오페라 애호가들은 저마다 부산에 새로운 별명을 붙였다. '부체른'과 '부레겐츠', '부랑주' 등. 세계적 음악축제로 유명한 스위스 루체른, 호수 위 야외오페라의 도시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고대 로마극장에서 오페라를 공연하는 프랑스 오랑주를 부산에 빗댄 말이다. 루체른의 열기와 브레겐츠의 수상무대, 오랑주의 시원한 바람이 부산에 모였기 때문이다.



북항 야외무대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부산 출신 무대디자이너 김현정이 설계한 트러스형 구조물과 무대 양쪽을 가득 채운 붉은 천이 시야를 장악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천은 카르멘의 정열과 자유를 드러내는 동시에, 돈 호세와 함께 향하게 될 피의 결말을 암시했다.

야외 공연 특성 상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음향은 자연스러운 어쿠스틱(울림)은 아니었다. 드넓은 야외 무대에서 가사와 음악을 또렷하게 전달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악기와 성악의 균형도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정명훈은 음향적으로 열악한 야외무대에서도 오케스트라를 완벽히 장악했다. 서곡부터 특유의 순발력 넘치는 지휘로 비제 특유의 리듬과 색채를 놓치지 않았다. 음악은 한순간도 무겁게 가라앉지 않았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악장 박지윤이 리드를 맡은 APO(아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작품 전체를 든든히 받쳤다.



작품을 연출한 엄숙정은 과거 정명훈과 함께 선보였던 두 차례의 콘서트오페라 <카르멘>보다 입체적인 드라마를 만들었다. 무대와 의상, 분장과 군중의 동선이 더해진 프로덕션 오페라에서 그는 각 장면의 이야기적 배경과 인물의 심리를 세밀하게 드러냈다.

특히 무대의상의 색채 변화가 효과적이었다. 3막까지 정열과 자유를 상징하는 붉은색 의상을 입었던 카르멘은 4막에서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작품을 처음 보는 관객도 그의 운명을 직감할 수 있는 복선이었다. 의상이 장식에 머물지 않고 서사를 이끄는 연출의 언어로 기능했다.

이번 공연은 대규모 군중도 단순한 배경으로 세워두지 않았다. 군인과 담배공장 노동자, 밀수꾼, 투우장으로 몰려가는 시민들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클래식부산 합창단, 김해시립합창단과 해운대구립소년소녀합창단은 넓은 야외무대를 채우며 공연의 규모와 생동감을 더했다.

4막에서 남녀 합창단과 어린이합창단이 일제히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투우사를 환영하는 극중 군중의 몸짓이었으나 머지 않아 부산에서 열릴 '오페라의 시간'을 반기는 인사처럼 보였다.



지난해 12월, 부산에서 열린 콘서트형식 <카르멘>에 출연했던 메조소프라노 미셸 로지에가 카르멘 역을 맡았다. 로지에는 '하바네라'보다 '세기디야'에서 더욱 빛났다. 돈 호세를 유혹해 자신을 풀어주도록 만드는 장면의 아리아다. 눈빛과 몸짓, 리듬을 타는 움직임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농염하면서도 능동적인 카르멘이었다. 단순한 팜파탈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숨기지 않는 여성상을 보여줬다.

돈 호세 역의 테너 김정훈은 야외무대에서도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인한 체격의 병사로 등장한 그는 무대를 밀어붙이는 강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외형적으로는 흔들림 없는 군인이었지만, 카르멘에게 사로잡힌 뒤 질투와 집착으로 무너지는 감정 변화도 점차 드러냈다.

에스카미요 역의 바리톤 이동환은 투우사의 기백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당당한 자세와 자신감 넘치는 움직임으로 등장 때마다 무대의 온도를 끌어올렸다. 미카엘라 역의 소프라노 김순영은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순수하면서도 강단 있는 인물을 그렸다.

마이크를 사용하는 야외무대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음량이 약점으로 부각되지 않았고, 그의 섬세한 표현이 객석까지 고르게 전달됐다. 메르세데스 역 메조소프라노 김가영과 프리스키타 역 소프라노 이혜지 등 카르멘 전문 조역들의 앙상블도 탄탄했다.




가장 아쉬움을 남긴 이는 단카이로 역의 테너 위정민이다. 대형 중계 화면을 통해 송출된 지나치게 과장된 그의 표정 연기가 문제였다. 특히 주역에게 주의가 집중돼야 할 장면마다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특유의 허스키한 음색 역시 배역의 거친 성격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일부 앙상블에서는 다른 성악가들의 울림 있는 발성과 이질적으로 들렸다.

공연 분위기가 무르익는 데는 부산의 바다와 바람도 한몫했다. 11일 공연에서는 3막이 시작될 무렵 북항에 정박해 있던 크루즈가 뱃고동을 울려 뜻밖의 음향 효과를 더했다. 12일 공연 4막에서는 돈 호세가 카르멘에게 마지막으로 매달리고, 카르멘이 이를 거절하는 순간 강한 바람에 무대 장치 일부가 넘어졌다. 돌발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과 절묘하게 겹치며 극적 긴장을 높였다. 실내극장에서는 통제해야 할 소음과 바람이 야외 무대에서는 연출 자체가 됐다.



클래식부산 박민정 대표는 “이틀간 공연장을 찾은 부산 시민과 영상으로 관람한 시청자를 합하면 약 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고 말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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