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신진서 對 카타고 기신전에 부쳐

입력 2026-07-15 17:36   수정 2026-07-16 00:11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상 시상식에도 일본 전통의상 하오리하카마를 입고 나올 정도로 일본 미학에 대한 자부심이 투철했다. 그의 작품 중에 참으로 일본적 소재, 바둑을 다룬 <명인(名人)>이 있다.

300여 년간 이어온 일본 최고 바둑 가문인 혼인보(本因坊)의 21대 세습자 슈사이 명인의 은퇴기(棋)라는 실화에 바탕하고 있다. ‘50년 불패’ 슈사이 명인의 은퇴기(1938년)는 대국 상대자를 선발하는 데만도 1년 반이 걸렸다. 첫 대국은 서로 딱 한 수씩만 두고 끝내고, 나흘 간격으로 제한 시간 40시간에 14회에 걸쳐 대국이 진행되는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예순다섯의 명인과 서른의 상대 기사 간 대국은 6월에 시작했지만, 명인이 대국 중반 병으로 쓰러져 석 달을 쉬는 바람에 12월에야 끝났다. 본인이 6단의 아마 고수인 가와바타가 일본 신문에 쓴 총 64회의 관전기를 토대로 10여 년이 지나 작품화한 것이다.

슈사이 명인은 50년 불패 신화를 끝내 이어가지 못하고 패했다. 그러곤 1년 뒤 결국 몸을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일본어 ‘잇쇼켄메이(一生懸命)’처럼 정말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한 것이다. 이 대국은 일본 바둑계에서 사건이 됐다. 슈사이 명인이 은퇴기에서 패한 뒤 혼인보 명칭을 일본 기원에 양도해 혼인보 타이틀전이 창설됐다. 세습의 과거에서 공개경쟁의 현대로의 일대 전환이 이뤄졌다. 소설에서 슈사이 명인은 실제 이름 그대로 쓰이지만, 상대는 오타케 7단으로 나온다. 그 실존 인물이 한국에서도 유명한 기타니 미노루다. 하루 열여덟 공기의 밥을 먹는 대식가답게 그의 도장 제자들의 단수를 합하면 500단이 넘는다고 한다. 조치훈과 더불어 조남철, 김인, 윤기현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이 대국이 일본 바둑계의 근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면, 바둑 한 판이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일도 있다. 2016년 3월 알파고 쇼크다. 이세돌은 5개월 전 알파고와 유럽 최고 기사 판후이 간의 기보를 보고는 전승을 자신했다. 그는 마침 알파고 대국 시기와 겹친 결혼 10주년 선물을 고르는 데 신이 났었다고 했다. 그 5개월간 알파고가 수백만 번의 머신러닝으로 괴물이 된 것을 알 길이 없었다. 알파고전 2국에서 알파고의 흑 37수, 4국에서 버그를 유발한 이세돌의 백 78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양팔에 문신을 새겨 넣을 정도로 밈이 됐다.

당시 바둑 세계 1위는 중국의 커제였다. 커제는 자기보다 이세돌이 먼저 알파고의 상대가 된 것에 몸이 달았다. 물론 알파고 대국의 흥미를 극대화해 중국 시장에 재진입하려 한 구글 측의 철저한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커제와 알파고 간 대결은 1년2개월 뒤인 2017년 5월에 이뤄졌다. 커제는 이세돌을 통해서 알파고가 ‘꼼수’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이 점을 파고들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사이 수백만 번의 자기 학습으로 그 약점마저 완벽히 보완하고 온 알파고에 철저히 당했다. 바둑이 안 풀리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는 버릇이 있는 커제는 세 차례 대국 중 12시간 동안 머리카락을 꼬다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이세돌은 자신의 세상이 무너졌다며 아예 바둑판을 떠났다.

알파고 쇼크 10년 뒤인 지금, 또 한 차례 흥미로운 AI 바둑 이벤트가 열린다. 바둑 세계랭킹 1위 신진서 9단과 현존 최고 수준의 AI 바둑 카타고 간의 세 차례 대국이 내일 시작된다. 기실 AI와 인간 간 맞바둑은 이미 격차가 판명 난 지 오래다. 신 9단의 표현대로 “인간과 오토바이 간 달리기 시합 격”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국이 의미 있는 것은 AI 시대, 인간의 최고 두뇌 게임인 바둑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신 9단이 두 점을 먼저 까는 접바둑에 시간제한에서도 차이를 두는 방식인데, AI와 인간 간 대결 시 표준 룰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대회 후원자인 국내 1위 수학참고서 ‘쎈수학’의 저자 홍범준 좋은책신사고 대표의 말대로 표준 룰에 입각한 대결로 AI에 대한 인간의 열패감을 극복해가는 과정일 수 있다. 신 9단과 카타고 간 두 점 접바둑은 승패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바둑 팬에게는 삼복더위를 잊게 할 묘수의 향연이, 문외한에게도 인간과 AI 간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장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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