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아비뇽] 2000석 교황청 채운 침묵…아비뇽 여름밤에 내린 한강의 ‘눈’

입력 2026-07-16 19:27   수정 2026-07-16 19:33

[여기는 아비뇽] 2000석 교황청 채운 침묵…아비뇽 여름밤에 내린 한강의 ‘눈’


프랑스 남부의 뜨거운 여름밤, 중세 교황청에 눈이 내렸다. 15일(현지시간) 밤 10시, 연극 예술의 성소로 불리는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명예극장. 한낮의 더위가 채 식지 않은 야외였지만, 무대 뒤편 거대한 석조 성벽의 아치형 창문 사이로 하얀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자 객석에는 순식간에 겨울의 공기가 감돌았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1부를 무대로 옮긴 낭독극 ‘새(Oiseau)’가 베일을 벗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경하’를, 한국의 명배우 이혜영이 ‘인선’을 맡아 목소리를 합친 이번 공연은 텍스트가 지닌 순수한 힘으로 아비뇽의 밤을 깊은 문학적 정적에 잠기게 했다.
2000명이 채운 침묵, 화려함 없이도 압도적
이날 1947석 규모로 알려진 명예극장은 관객들로 빈틈없이 들어차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밤 10시에 시작해 자정이 다 돼 끝나는 늦은 시간대의 공연이었지만, 관객들은 두 시간 가까이 숨소리마저 아끼며 높은 집중력을 보여줬다. 화려한 무대 장치나 역동적인 퍼포먼스 없이 오직 두 배우의 낭독과 절제된 움직임만으로 채워진 공연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무대 위 두 배우는 위아래 모두 순백의 의상을 맞춰 입고 등장했다. 이들의 흰옷은 소설의 배경인 제주의 설원이자 역사 속 희생자들의 영혼을 연상시켰다. 두 배우는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대사를 주고받았고, 때로는 두 언어가 서로를 감싸듯 겹쳐졌다. 낭독에 옅은 연기를 더한 형식으로, 움직임은 최소화했지만 시선과 호흡, 손짓 하나까지 세밀하게 조율했다.

무대 뒤 교황청 성벽의 아치형 창문에는 눈발이 끊임없이 흩날리는 영상이 투사됐다. 무더운 아비뇽 한복판에서 관객들은 제주의 폭설 속을 헤매는 경하와 함께 겨울을 건너는 듯한 감각을 경험했다. 돌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건축물과 새하얀 눈의 대비는 한강 소설 특유의 차갑고 고요한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왜 하필 1부 ‘새’였나
공연을 연출한 줄리 들리케는 소설 전체 서사 가운데 1부 ‘새’를 독립된 낭독극으로 구성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 현대사의 참혹한 비극 중 하나인 제주4·3을 다루지만, 소설은 그 거대한 역사를 곧바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다친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은 경하가 제주 집에 홀로 남겨진 작은 새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지극히 사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들리케가 주목한 것도 이 지점이다. 관객이 낯설고 무거운 역사적 비극에 곧바로 부딪히기보다, 연약한 생명을 구하러 가는 여정에 먼저 감정을 이입하도록 이끈다. 돌보는 이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작은 새는 역사적 폭력 앞에 놓인 무고한 생명들의 취약성을 상징하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현실과 꿈, 산 자와 죽은 자의 영혼이 혼재하는 1부의 시적이고 몽환적인 텍스트는 물리적 재현 대신 배우의 목소리와 언어의 리듬으로 무대를 구축하는 낭독극 형식에도 잘 맞아떨어졌다.
피날레, 흰옷 입은 한강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의 절정은 마지막 5분이었다. 이자벨 위페르와 이혜영의 낭독이 이어지던 무대에 흰 원피스를 입은 한강 작가가 직접 등장해 소설 3부 ‘불꽃’에 나오는 인선의 대사를 육성으로 낭독했다.

이 대목은 소설 속 개인의 사적인 슬픔이 제주4·3이라는 거대하고 참혹한 역사적 진실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분기점이다. 미군정의 냉전 논리와 서북청년단의 폭력이라는 학살의 구조적 배경을 짚어내는 동시에, 새를 구하려는 개인적 여정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인선 가문의 비극이자 제주의 아픈 역사로 확장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문장을 직접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자 객석의 침묵은 한층 더 깊어졌다.

두 언어와 국경을 넘어선 울림
낭독이 끝난 뒤 한강과 이자벨 위페르, 이혜영이 나란히 서서 객석을 향해 인사하자 비로소 길고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스위스에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아비뇽을 찾았다는 미리암 부르샤 씨는 “한강 소설의 오랜 팬”이라며 “여러 작품을 읽었지만 특히 <바람이 분다, 가라>를 좋아한다. 오직 한강의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원작을 이미 읽었다는 안느 지레르 씨는 텍스트를 무대 위 목소리로 다시 만난 기쁨을 전했다. 그는 “책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며 “다만 소설을 읽을 때도 조금 혼란스러웠던 부분, 주인공이 눈 속에서 살아 있는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고 유령들을 만나게 되는 장면은 이번에도 여전히 아리송했다”고 했다. 한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는 “프랑스어와 한국어 두 언어가 함께 흘러가는 구성이 흥미로웠다”며 “자막을 읽으며 따라갈 수 있어 전혀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두 언어가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 작품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원작을 읽지 않고 공연장을 찾았다는 로베르 지레르 씨는 한국어 고유의 울림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는 “외국어의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한국어가 작품의 시적인 분위기를 더해주는 느낌이었다”며 “두 여성과 새를 둘러싼 이야기는 매우 아름답고 시적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전쟁과 학살에 대한 긴 이야기가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해 두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웠다”며 “솔직히 중간에 잠깐 졸기도 했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복잡하지 않고 천천히 흘러가 다시 집중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웃었다. 이자벨 위페르의 낭독에 대해서는 “정말 훌륭했다. 작품을 아주 깊이 있게 해석해냈다”고 평가했다.

아비뇽=설지연 기자/김은진 아르떼 객원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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