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서 뉴욕까지…HBM 개척 '메모리 마스터' 최태원의 발자취 [강경주의 테크X]

입력 2026-07-18 14:00   수정 2026-07-20 07:23

청주에서 뉴욕까지…HBM 개척 '메모리 마스터' 최태원의 발자취 [강경주의 테크X]


SK하이닉스의 성장사는 업황보다 기술을, 단기 실적보다 연구개발(R&D)을 선택한 20여 년의 기록이다. 워크아웃(기업 회생절차) 속에서도 시장의 외면을 받던 고대역폭메모리(HBM)에 10년을 투자한 집념은 인공지능(AI) 시대를 이끄는 승부수가 됐다.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계기로 새 출발선에 선 최태원 SK그룹 회장 앞에는 기술 초격차를 계속 증명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놓였다.
"기술은 있었지만 돈이 되지 않았다"…하이닉스의 위기
1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의 전신은 1983년 설립된 현대전자다. 현대전자는 1947년 출범한 금성전자(현 LG전자), 1969년 설립된 삼성전자와 비교하면 국내 주요 전자기업 가운데 비교적 늦게 설립됐다.

초기 현대전자는 지금의 삼성전자처럼 반도체는 물론 휴대폰,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전자사업을 영위했다. 훗날 팬택에 인수된 현대큐리텔과 중국 하이센스에 넘어간 하이디스도 모두 현대전자에서 출발한 사업이다.

하이닉스의 위기는 1999년 시작됐다. 하이닉스의 전신이었던 현대전자는 LG반도체를 인수하며 단숨에 세계 2위 D램 업체로 도약했지만 그 대가로 떠안은 부채는 15조원을 훌쩍 넘겼다. 1999년 인수 직후 D램 가격은 64Mb 기준 개당 7~8달러 수준이었지만 2001년 닷컴 버블 붕괴와 함께 가격은 1달러 아래로 추락했다. 매출이 수직 낙하했고, 이자비용은 연간 1조원 안팎이 고정적으로 나갔다.

업계에선 이 시점의 하이닉스가 기술적으로 부족한 회사는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하이닉스는 D램 회로를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1000분의 1 수준인 150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m)까지 미세화한 공정을 양산에 안착시켰고, 고속 데이터 처리용 DDR D램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회사로 평가받았다. 시장 점유율은 15% 안팎으로,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 최상위권이었다. 하이닉스의 위기는 기술 격차가 아니라 가격 폭락과 재무 부담이 핵심이었다.

2001~2002년은 하이닉스가 존폐의 기로에 놓인 시기다. 최악의 다운 사이클에 회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갔기 때문에 채권단 관리 아래 생존 여부가 결정됐다. 주채권은행은 외환은행이었고 산업은행과 우리은행,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등이 공동 채권단을 구성해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채권단은 신규 자금 지원과 출자전환, 만기 연장 등을 패키지로 제공하며 회생의 시간을 벌어줬다. 재무제표는 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1999년 순이익 2243억원을 마지막으로 2000년대 초반 하이닉스는 2000~2003년 5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누적 적자는 11조원 이상이었다.

당시 하이닉스를 이끌던 인물은 외환은행 출신의 '재무통' 우의제 사장이었다. 반도체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죽기 직전 인공호흡기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던 하이닉스에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우 사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1967년 외환은행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2000년까지 33년간 외환은행에서 근무한 정통 은행원 출신이다. 그런 그가 하이닉스 사장을 맡은 것은 2002년 7월. 11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있던 하이닉스에 대해 채권단이 워크아웃 결정을 내린 직후였다.

우 사장 앞에 놓인 상황은 심각했다. 마이크론으로의 매각 작업이 마지막 단계에서 하이닉스 이사회의 부결로 무산되자 하이닉스는 독자 생존의 길을 택해야만 했다. 회사 내부에서 직원들조차 그에게 '채권단에서 파견된 점령군', '반도체를 전혀 모르는 뱅커 출신 사장'과 같은 꼬리표를 붙였다.

하지만 우 사장은 특유의 친화력과 뚝심 경영으로 회사 안정화 작업에 돌입했다. 그의 첫 번째 판단은 회사를 쪼개 팔기보다 어떻게든 생존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무 관점에서는 채권 회수의 속도가 느려지는 결정이었지만 기술 경쟁력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우 사장은 비핵심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도 핵심 연구개발(R&D) 인력만은 최대한 유지했다. 반도체 제조 기술인 300mm(12인치) 웨이퍼 전환을 생존 전략의 중심에 놓은 것도 그의 판단이었다. 당시로서는 고비용·고위험 선택이었지만 이 전환은 웨이퍼 1장당 생산 비트를 대폭 늘려 비트당 원가를 구조적으로 낮추는 선택이 됐다.

신제품 개발생산에 필요한 R&D 및 새 장비 구입 투자 자금이 부족해 기존 장비를 일부 개조하고 그에 맞는 공정을 개발해 양산에 임하겠다는 위험 부담이 큰 '블루칩 프로젝트'가 주효했다. 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시도였지만 블루칩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1조원 이상의 투자 효과를 거둔 쾌거는 성공적인 기업 회생 사례로 큰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전환점은 2003년 이후였다. 글로벌 PC와 서버 수요 회복으로 D램 메모리 가격이 바닥을 찍고 회복을 시작했고, 하이닉스는 재무 부담이 완화된 상태였다. 2003년 말부터 손익이 반등해 2004년에는 1조692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2005년 매출은 약 6조970억원, 영업이익 2조240억원으로 구조조정 전 대비 이례적으로 빠른 실적 회복세를 보였다. 그렇게 하이닉스는 3년9개월 만에 채권단 워크아웃 졸업하고 위기에서 벗어났다.

구조조정과 생산성 향상, R&D 투자 지속 등을 지휘하며 좌초 위기의 하이닉스를 세계 메모리 반도체 2위 회사로 부활시켰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대다수의 언론은 2005년 워크아웃 졸업을 "예정보다 1년 반 앞당긴 조기 정상화"라며 "클린 하이닉스"라고 평가했다. 한 매체는 "재무구조 개선과 기술 경쟁력 회복이 결합된 성공 사례"로 전했다.
시장의 의심 10년 견딘 최태원 회장
오늘날 SK하이닉스를 D램 세계 1위로 끌어올린 결정적 제품은 HBM이다. 하지만 HBM이 빛을 보기까지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시장의 외면과 잇단 실패에도 개발을 멈추지 않은 엔지니어들의 집념이 만든 결과였다.

HBM은 2013년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제품이다. 당시 고객사였던 AMD는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성능을 높인 새로운 메모리를 요구했고, SK하이닉스는 개념 수준에 머물던 기술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해 공급했다. 그러나 HBM은 지금처럼 AI용이 아니라 게임용 그래픽카드를 겨냥한 제품이었다. AMD 그래픽카드 사업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HBM도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주도권마저 삼성전자로 넘어갔다. SK하이닉스가 당시 엔비디아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자 삼성전자가 HBM2를 앞세워 공급을 독점했다. 엔비디아는 2016년 출시한 P100 GPU에 기존 GDDR 대신 HBM2를 적용했고, 이는 AI 학습 성능을 크게 끌어올리며 HBM이 AI 반도체의 핵심 메모리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반전은 2018년에 찾아왔다. 삼성전자가 HBM 조직을 축소하면서 시장의 기대도 함께 식었다. HBM은 일반 D램보다 웨이퍼를 세 배 가까이 사용하는 데다 시장 규모도 작아 수익성이 낮은 제품으로 평가받았다. SK하이닉스 내부에서도 사업 지속 여부를 두고 회의론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SK하이닉스는 HBM이 AI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메모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만큼 이번에는 삼성을 반드시 따라잡겠다는 의지도 강했다. 결국 SK하이닉스는 차세대 HBM 개발에 성공했고, HBM3부터 엔비디아의 핵심 공급사로 올라섰다.

진정한 전환점은 2022년 11월 챗GPT 등장 이후였다. 생성형 AI 열풍으로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요가 폭증하면서 HBM도 공급 부족에 빠졌다. 이때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던 업체는 수년 전부터 HBM에 선제 투자해온 SK하이닉스였다. 10년 동안 시장의 의심을 견디며 기술을 지켜온 엔지니어들의 선택이 결국 SK하이닉스를 AI 시대 최대 수혜 기업으로 만들었다.

최 회장은 전날 자신의 링크드인에 글을 올려 SK하이닉스ADR 상장 소회를 전하면서 모든 공을 직원들에게 돌렸다. 그는 "당시 많은 사람이 인수를 의심했고 회사는 파산 직전이었으며 메모리는 범용 제품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이어 "SK하이닉스 임직원들은 회사를 정상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메모리 분야의 선도 기업이자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켰다"며 "꿈을 현실로 만든 SK하이닉스 임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엔지니어들을 치켜세웠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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