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7년 무렵 로마의 교황궁. 교황 니콜라오 5세가 50대의 초라한 수도사 한 명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교황은 수도사가 속한 가톨릭교회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자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권력자였습니다. 식탁에는 김이 오르는 고기 요리도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수도사가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고기도 좀 먹어 보시오.” 교황이 권하는데도 수도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수도원장님의 허락 없이는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미친 거 아냐? 바보인가?' 교황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 속으로 다들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남자는 끝내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 조용히 일하러 돌아갔습니다.
그 수도사, 프라 안젤리코(1395~1455)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림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 그랬던 그는 훗날 그림으로 복자(福者·가톨릭교회가 공식으로 공경하는 사람)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삶과 작품을 지금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당시까지의 수태고지 작품에 흔했던 화려한 요소들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금빛 광선이나 호화로운 옷도 없지요. 전반적으로 그림은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분위기도 다릅니다. 이전까지 수태고지 그림의 분위기는 대부분 위압적이고 웅장했습니다. 천사가 '신의 뜻이 이러하다'고 통보하면 마리아는 영광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지요. 반면 이 작품은 인간적입니다. 천사가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고 다가서는 자세와 표정에는 상대방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편 조용히 두 팔을 모은 마리아의 눈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아주 살짝 비칩니다. 서양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하고 성스러운 장면 중 하나에 평범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그린 겁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는 세속적인 느낌이 없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실제로 보는 이 그림은 너무나도 고요하면서도 우아합니다. 밝아오는 새벽빛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은 종교가 없는 사람조차도 숨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라파엘로를 비롯한 후배 화가들은 그 아름다움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후 수태고지 그림들은 점점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삶도 자신이 그린 이 작품의 분위기를 닮아 있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귀도 디 피에트로입니다. 1395년께 피렌체 인근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안젤리코는 그림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스무 살 무렵 피렌체로 나온 그가 일을 시작한 곳은 대성당(두오모) 바로 옆. 이곳에서 안젤리코는 책에 삽화와 장식을 그려 넣는 일을 했습니다.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는 화가로도 활동합니다. 스물세 살 무렵에는 성당에 그림을 그려주고 12 플로린(현재 가치 700만~800만원 정도)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젊을 때부터 꽤 잘나갔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안젤리코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그것도 규칙이 굉장히 깐깐한 곳이었습니다. 개인 재산은 한 푼도 가질 수 없고, 먹을 것은 얻어 와야 하는 탁발 수도회. 말하자면 '무소유'를 추구하는 곳이었지요.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그는 세 가지를 평생 지키겠다고 서약합니다. 가난하게 살 것, 결혼하지 않을 것, 수도원장에게 복종할 것.
잘나가던 젊은 화가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속세에서 계속 일하면 큰돈을 벌어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요. 그 이유는 훗날 안젤리코가 한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근심이 없고 조용한 삶이 필요하다.”

안젤리코가 들어간 도미니코 수도회는 글을 못 읽는 서민들에게 그림으로 성경 이야기를 전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수도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습니다. 안젤리코가 원한 건 이런 환경이었습니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작업장과 도구까지 주는 환경. 그림값 흥정, 일감 영업, 밥벌이 계산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오직 그림만 있는 하루. 그림밖에 몰랐던 안젤리코는 수도원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삶 자체를 평화로운 작업실로 만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천재가 1428년 스물일곱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이 안젤리코였습니다. 그는 마사초의 신기술을 누구보다 빨리 흡수했습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이 시기의 안젤리코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당대 피렌체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수요가 많은 화가였다."
안젤리코의 그림은 갈수록 새로워졌습니다. 스승 세대가 그리다 남긴 제단화를 이어받아 완성할 때는 고급 제단화의 상징이던 금박 배경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진짜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그렸습니다. 그림 속 신의 세계를 사람 사는 풍경처럼 그린 겁니다.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까지 최후의 심판 그림의 주인공은 지옥이었습니다. "착하게 살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며 무시무시한 형벌 장면으로 겁을 주는 일종의 경고판 역할을 했지요. 그런데 안젤리코는 반대쪽인 천국에 공을 들였습니다. 그가 그린 천국 문 앞에서는 천사와 사람들이 손을 잡고 꽃밭에서 둥글게 춤을 춥니다. 그전까지 어떤 최후의 심판에도 없던 장면입니다. 안젤리코는 성스러운 주제의 그림을 그리면서도 항상 우리 주변에 있는 것, 인간적인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마음을 작품에 담으려 했습니다.
이런 안젤리코에게 고가의 그림 주문이 밀려들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유럽의 돈이 모두 모여드는 금융 도시. 이곳에서 발행한 돈 '플로린'은 지금의 달러처럼 유럽 어디서나 통하는 화폐였습니다. 만약 안젤리코가 속세의 일반적인 화가였다면 아마도 그는 떼돈을 벌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림값은 전부 수도회 금고로 들어갔습니다. 일감을 받을지 말지도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았지요. 작업을 마친 그림은 두 번 다시 고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처음 그린 그림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그날의 그림에만 온 신경을 쏟는 삶. 그런 삶을 살던 40대의 안젤리코에게 1436년 인생 최대의 의뢰가 들어옵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돈이 많은 남자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이자를 받는 일을 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은행업으로 큰돈을 번 코시모는 항상 지옥에 갈까 봐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런 코시모가 교황을 만나게 됐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덜 수 있겠습니까.” 교황은 답했습니다. “산마르코 수도원에 1만 플로린(지금 돈으로 약 60억원)을 쓰시오.” 그렇게 대공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수도원 벽화를 책임질 사람으로 안젤리코가 지목된 것이었습니다.

안젤리코는 수 년간 회랑과 회의실과 복도, 수도사들이 잠자는 독방 44개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벽화는 전부 '프레스코'라는 기법으로 그렸습니다. 프레스코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입니다. 벽에 석회 반죽을 바른 뒤 반죽이 마르기 전에(신선할 때) 물감을 입혀 벽과 함께 굳히는 기법이지요. 한 번 마른 부분은 고칠 수 없고 고치려면 벽을 뜯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적잖은 화가들은 이 기법으로 그림 그리기를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안젤리코에게는 이보다 잘 맞는 기법이 없었습니다. '다 그린 그림은 고치지 않는다'가 그의 평소 신조였으니까요. 물감이 마르면서 색은 옅어지고, 광택 없이 가라앉았습니다. 그의 그림 특유의 맑고 차분한 파스텔 빛은 안젤리코의 실력과 기법의 특징이 만나 나온 색이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하는 묵상은 수도사의 중요한 일과. 안젤리코가 그린 벽화는 그 일과를 돕는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독방 벽화는 흰 벽에 묽은 색 몇 가지가 전부입니다. 크기와 모양은 방마다 하나씩 난 창문과 똑같이 맞췄습니다.
그림 내용은 방 주인에 맞춰 처방됐습니다. 갓 들어온 10대 신참 방에는 따라 할 기도 자세의 시범을, 고참 방에는 곱씹을 장면 하나를, 글을 못 읽는 수도사 방에는 줄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이야기 그림을 넣었습니다. 수태고지의 천사가 마리아를 배려하던 그 마음 그대로, 그림 볼 사람 하나하나에 맞춘 설계였습니다.



앞에서 본 '수태고지'가 있는 장소가 바로 여기입니다. 미술관 벽이 아닌 산마르코 수도원 2층으로 오르는 계단 꼭대기. 수도사들이 방에 가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야 하는 복도의 벽입니다. 그림 속 기둥 꼭대기의 장식은 이 수도원 회랑의 기둥에서 따왔고, 액자처럼 보이는 회색 테두리는 실제 벽 몰딩을 그대로 그린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빛입니다. 그림 속 빛은 동쪽에서 들어옵니다. 아침마다 실제로 이 복도에 드는 햇빛과 같은 방향이지요. 해가 뜨면 진짜 새벽빛과 그림 속 빛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마리아의 옷도 이전의 다른 화가들이 그리던 원색의 빨강과 파랑 대신 흰 드레스, 짙은 색의 망토 차림입니다. 바로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복의 색입니다. 천사의 날개에는 회반죽에 석영 가루를 섞어 발랐습니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지만 실물 앞에 서면 날개가 은은하게 반짝입니다. 그림 아래에는 검은 글씨의 라틴어 한 줄이 적혀 있습니다. "이 그림 앞을 지날 때 아베 마리아(짧은 기도문) 바치는 것을 잊지 말라." 안젤리코가 직접 쓴 글씨라고 합니다. 화가의 손글씨 안내문이 붙은 복도의 이 알림판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 중 하나가 돼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본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안젤리코의 그림이 대단하다는 소문은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이번에 안젤리코를 부른 곳은 로마 교황청이었습니다.


교황이 고기를 권하자 안젤리코가 "수도원장 허락 없이는 못 먹는다"고 했던 사건이 바로 이 로마 시절 일어났습니다. 물론 서열은 교황이 수도원장보다 훨씬 위였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따지면 당연히 교황의 말을 듣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30년 동안 몸에 밴 '허락은 수도원장에게 받는다'는 원칙은 최고 권력자 앞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보 같을 만큼 한결같은 태도에 교황도 그저 미소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로마에서 일을 마친 안젤리코는 50대 중반에 고향 수도원으로 돌아가 3년간 수도원장을 지냈습니다. 임기를 마친 그는 다시 로마로 불려 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게 마지막 여행이었습니다. 1455년 2월 안젤리코는 로마의 수도원에서 예순 살 안팎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내 성당의 제단 곁에 묻혔습니다. 당시 화가로서는 이례적인 예우였습니다.
안젤리코가 죽고 10여년이 지났을 때 피렌체의 한 시인은 그의 그림을 두고 처음으로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사 같은 화가 수도사(프라 안젤리코).' 이 별명은 퍼져나가 본명 대신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됐습니다. 어느새 여기에 호칭이 하나 더 붙었습니다. '베아토 안젤리코(복자 안젤리코)'.
그리고 안젤리코 사후 527년이 흐른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복자로 선포했습니다. 삶의 온전함과 그림의 신(神)적인 아름다움이 이유였습니다. 그림 자체가 이 사람의 성스러움을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전 세계 예술가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그림을 그리는 평온한 삶. 안젤리코가 삶에서 원한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이나 출세 같은 다른 것들을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욕심을 버리자 두려움과 망설임은 사라졌고, 평온해진 마음은 교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얻은 평온으로 안젤리코는 아무도 안 볼 골방의 벽에, 글을 못 읽는 수도사의 방에, 그림을 볼 사람 한 명 한 명을 생각하며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수백 년이 지나도록 관객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줍니다.
돈이 세상의 전부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600년 전 피렌체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돈이 모여들던 도시, 코시모 데 메디치처럼 죄책감까지 돈으로 갚던 도시였으니까요. 그 한복판에서 안젤리코는 돈보다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다.
물론 그의 삶을 그대로 본받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현실에서 돈은 중요합니다. 게다가 안젤리코는 종교에 귀의한 수도사였습니다. 다만 이런 삶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욕심을 하나씩 내려놓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몰두한 사람, 그렇게 얻은 평온으로 남의 마음까지 어루만진 사람.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의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삶과 작품에서 전해지는 향기, 새벽빛 같은 그 고요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내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니까요.

<i>*마침 올해 피렌체에서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안젤리코의 벽화 곁에 나란히 거는 전시도 열리고 있습니다. 다녀와서 기사를 썼으니 함께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포털 정책상 직접 링크는 금지돼 있어 제목을 검색해야 합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 </i>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 피렌체에서 뿌리를 찾다
<i>**이번 기사는 William Hood의 'Fra Angelico: San Marco, Florence'을 중심으로 Laurence Kanter·Pia Palladino의 'Fra Angelico'(메트로폴리탄미술관), Giorgio Vasari의 '예술가 열전', 메트로폴리탄미술관·프라도미술관의 작품 해설, 팔라초 스트로치 'Fra Angelico' 전시(2025~26) 도록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미술 소식과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 걸작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리즈에서 다룬 여러 거장들의 명작들을 실제로 볼 기회입니다. 최근 출간된 책 '명화 시리즈'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과 함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