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 디자이너, 미술감독, 무대 연출가. 정구호라는 이름 앞엔 늘 여러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작가로 관람객 앞에 섰다. 지난달 26일 개막한 전시 ‘白骨銅 백골동’에서 대표 연작 ‘공생’의 신작 15점을 선보인다.
작품은 조선 시대 안방을 지키던 반닫이다. 원래 귀중품을 감추는 용도였던 이 가구를, 그는 나무 대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크릴로 다시 만들었다. 개막일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에서 만난 정구호는 “속이 훤히 보이게 만들었지만 저 반닫이의 용도는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라며 “남에게 드러내기 힘든 마음속 귀한 생각들을 꼭꼭 숨겨두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구호는 패션 브랜드 KUHO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2013년 브랜드를 떠난 뒤 무대와 미술, 의상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그가 총연출을 맡은 서울시무용단 ‘일무’는 무용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베시 어워드’ 최우수 안무가·창작가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키아프 서울 2026’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도 맡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수식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는 “타이틀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굵직한 프로젝트들 사이에서도 정구호는 반닫이 작업을 놓지 않았다. 2020년 개성반닫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작 ‘공생’을 처음 선보인 이후 꾸준히 이어왔다. 출발점은 영화 ‘황진이’ 미술감독 시절 우연히 마주한 사진 한 장이었다. 병풍 대신 새 배경을 찾던 그는 구한말 평양 기생이 개성반닫이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개성반닫이가 당시 안방의 중심 가구이자 최고급 혼수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반닫이에 부착하는 금속 장식 ‘장석’의 아름다움에도 매료됐다. 그는 “장석의 매력에 빠져 장인을 찾아다니면서 ‘공생’ 연작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개성반닫이는 조선 후기 개성의 번영을 상징하는 가구다. 인삼 재배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개성 상인들은 의복뿐 아니라 장부와 어음, 현금, 가보 등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반닫이를 사용했다. 자물쇠를 채울 수 있어 일종의 금고 역할도 했다.
정구호는 이 ‘숨기는 가구’의 기능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화려한 장석은 살리되 몸체는 나무 대신 투명한 플렉시글라스(아크릴)로 제작해 내부가 훤히 보이게 했다. 전통 장석과 현대 소재가 서로를 보완하며 새 가치를 만든다는 ‘공생’의 의미, 그리고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소중한 생각을 담아두는 공간이라는 뜻을 함께 담았다. 그는 두 재료를 “가치는 있지만 기능을 잃은 재료와, 기능은 있지만 가치로 인정받지 못한 재료”라며 “두 재료가 작품 안에서 공존하며 새로운 의미를 찾길 바랐다”전했다.
작가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는 작품은 경기반닫이다. 개성반닫이가 아닌 경기반닫이를 모티브로 한 첫 작품이자 가장 큰 규모다. 장석이 빼곡한 개성반닫이와 달리 여백의 미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며, 장석 작업에만 약 3개월이 걸렸다.
전시장 한쪽에는 반닫이를 탑처럼 쌓아 올린 작품도 있다. 혼례와 제사상 등에서 음식이나 물건을 높이 쌓아 정성을 표현했던 우리 조상의 ‘고임 문화’에서 착안한 연출이다. 정구호는 “우리 조상들은 귀한 것일수록 높이 쌓아 올려 자랑하곤 했다”며 “관람객들도 저마다의 소중한 생각을 반닫이에 차곡차곡 쌓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24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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