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카타고를 이긴 한 수, 결행(決行)

입력 2026-07-19 17:20   수정 2026-07-19 17:26


“더 참으면 바둑이 미세해지겠다 싶었다. 그래서 결행했다.”

신진서 9단이 바둑 인공지능(AI) 카타고와의 두 번째 대국에서 승리한 뒤 꼽은 승부수와 그 이유다. 첫 대국 완패 뒤 거둔 290수, 흑 4집 반 승. 한경TV 유튜브 생중계를 동시에 지켜본 사람은 3만6000명을 넘었다. 그만큼 많은 이가 인간의 승전보를 기다렸다는 뜻이다.

물론 신진서가 두 점을 먼저 뒀고, 카타고는 매 수 20초 안에 착수했다. 인간이 AI의 절대 기력을 넘어섰다고 할 승부는 아니다. 그도 “실력적으로나 퍼포먼스적으로는 AI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했다.
그래도 이번 승리는 가볍지 않다. 신진서는 AI보다 더 많이 계산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반발하고 싶은 순간을 견뎠고, 더 물러서면 우세가 사라질 순간 중앙의 흑 196으로 백을 끊었다(아래 기보 참고). 중앙 좌측 백돌의 연결을 차단하며 전투를 본격화한 수였다.
◆“수도 없이 참아낸 고통의 시간, 중앙의 흑 196이 승착이었다”
신진서는 초반 우하귀에서 초대형 정석을 만들었다. 경우의 수를 줄이고 판의 골격을 먼저 세운 뒤, 미지의 중원으로 나아갔다. 바둑에서 중원은 인간에게 가장 어렵고 AI에는 가장 유리한 공간이다. 수읽기의 가지가 끝없이 뻗기 때문이다. 첫 대국에서 신진서는 이곳에 너무 일찍 뛰어들었다가 승기를 빼앗겼다.
두 번째 대국에서도 카타고의 공격은 매서웠다. 신진서 진영 깊숙이 들어와 붙이고 끊으며, 인간의 감각으로는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수를 잇달아 던졌다. 신진서는 “진짜 앞이 잘 안 보였고, 약간 어두컴컴해졌다”고 했다. 카타고가 2선으로 파고든 뒤에는 “숨도 못 쉬고 많이 맞아서 또 이렇게 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털어놨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을 쓰며 판을 다시 읽었다. 냉정하게 계산해 보니 아직은 자신이 좋다고 판단했다. 승부처는 중앙이었다. 더 물러서면 집 차이가 줄어 바둑이 미세해질 수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면 아마 끊지 못했을 텐데, 시간을 보니 여유가 있었다. 여기서 손해를 최대한 덜 보면서 전투를 하자고 생각했다.”

신진서는 흑 196으로 중앙의 백돌을 끊었다. 카타고와의 전투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 수를 스스로 승착으로 꼽았다. 무모한 공격이 아니었다. 형세와 시간, 전투의 위험을 모두 재본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공격하고 싶었던 장면이 수도 없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참았다”
두 번째 대국이 첫 번째와 달랐던 점은 인내였다. 첫 대국에서 신진서는 예상하지 못한 수에 흔들렸고, 결국 너무 일찍 중앙 전투에 들어갔다. 대국 뒤 그는 “지더라도 미세하게 버텼어야 했는데 전투를 해버렸다”고 자책했다.

연습 대국에서도 카타고와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 집 차이가 급격히 줄거나 역전당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두 번째 대국에서는 카타고가 던지는 모든 싸움을 받아주지 않았다.

“반발하거나 공격하고 싶었던 장면이 정말 수도 없이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정말 많이 참으면서 고통을 인내했다. 마지막에 중앙에 나와 끊을 때는 더 이상 참으면 바둑이 미세해지겠다 싶었다. 그때는 결행했고, 그게 승착이었던 것 같다.”

이 말에 두 대국의 차이가 담겨 있다. 첫 대국에서는 싸우고 싶은 마음이 판단보다 앞섰다. 두 번째 대국에서는 판단이 먼저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싸움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면 무모해지고, 싸워야 할 때까지 참으면 우세를 잃는다. 신진서가 흑 196으로 찾아낸 것은 바로 그 경계다.
◆“두 점에서 이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
신진서는 이번 승리의 의미를 과장하지 않았다. 두 점은 약 18집, 세 점은 약 30집 차다. 그 사이 12집은 엄청난 격차다. 그는 자신이 아직 카타고를 상대로 두 점에서는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말했다.

“두 점에는 안 될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번에 AI에 아직 두 점에서 이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2국은 특별했다. 끝내기만으로 우세를 지켜낸 승리가 아니었다. 중앙에서 카타고와 맞섰고, 수읽기 전투를 거쳐 승리를 거뒀다. 신진서는 “카타고와 연습할 때 끝내기로 이긴 기억은 있지만, 오늘처럼 수읽기 전투를 통해 이긴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퍼포먼스만 놓고 보면 이미 AI의 시대다. AI는 더 멀리 읽고, 더 빨리 계산하며,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둑의 중심까지 AI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인간 바둑의 스토리나 매력이 아직 존재한다고 느낀다.“
신진서는 많은 팬이 바둑을 찾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대국이 보여준 것도 그것이다. 인간이 AI와 맞서는 방식은 계산의 속도나 정확성으로 정면승부하는 데 있지 않다. AI의 강점을 인정하고, 그 계산을 배우고 활용하되, 언제 따르고 언제 거스를지를 결정하는 데 있다.

AI는 가능한 수와 확률을 제시한다. 그러나 무엇을 목표로 삼고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 그 결과를 누가 책임질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신진서는 카타고보다 더 빨리 읽어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수도 없이 싸우고 싶은 마음을 참았고,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될 순간을 알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으로 돌을 놓았다. AI는 최선의 수를 계산했지만, 싸울 시점을 선택한 것은 인간이었다. 그 한 수의 이름은 결행(決行)이었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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