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A씨는 다가오는 휴가를 앞두고 유명 피부과를 찾았습니다. 평소 1회 30만원인 레이저 시술을 10회 패키지로 결제하면 절반 가격인 150만원에 해주겠다는 '파격 특가 이벤트'에 솔깃해 흔쾌히 카드를 긁었습니다. 하지만 2회차 시술 후 심한 피부 트러블이 발생하자 병원 측에 남은 8회에 대한 환불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병원의 답변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병원 측은 "이벤트 할인가로 결제했기 때문에 병원 규정상 환불이 불가하다"며 "환불을 원한다면 1회 정상가(30만원)를 차감하고, 총결제 금액의 30%를 위약금으로 떼야한다"고 말했다. A씨는 억울했지만, 계약 당시 '이벤트 상품 환불 불가'라는 약관에 서명한 것이 떠올라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피부과나 성형외과에서 미용 시술 패키지를 끊었다가 환불 거부나 위약금 폭탄으로 피해를 보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행히 앞으로는 A씨와 같은 억울한 피해가 크게 줄어들 전망입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미용 의료기관 15곳을 대상으로 이 같은 불공정 약관을 적발하고 일제히 시정 조치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공정위의 이번 조치는 의료계에 만연한 불합리한 계약 관행에 철퇴를 내리고,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를 법적으로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할인가 환불 불가' 및 과도한 위약금의 위법성
다수의 병원은 그동안 계약서에 '계약일로부터 2개월 경과 시 환불 불가' 등 중도 해지 시 결제 금액의 20~30%를 위약금으로 떼는 약관을 버젓이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약관규제법 제9조에 따르면, 고객의 해제권 및 해지권을 배제하거나 그 행사를 제한하는 조항, 그리고 고객에게 부당하게 과중한 손해배상액을 예정하는 조항은 무효입니다. 의료 시술 계약은 계속적 계약으로 원칙적으로 소비자가 언제든 해지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는 이번 시정 조치를 통해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을 엄격히 적용해 총결제 금액의 10%만을 위약금으로 공제한 뒤 잔액을 환불하도록 약관을 뜯어고쳤습니다.미용 의료 분쟁에서 가장 큰 쟁점은 위약금 산정의 '기준점'입니다. 병원들은 이른바 '정상가'를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하고, 환불 시 이를 기준으로 차감해 실질적인 환불액을 0원으로 만드는 꼼수를 써왔습니다. 이번 조치는 위약금과 환불금 산정의 기준이 '소비자가 실제 결제한 대금'임을 명확히 한 것으로, 실무상 빈번하던 '할인 전 정상가 차감' 관행이 명백한 위법임을 재확인한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보입니다.
선납진료권은 소비자의 정당한 자산…자유로운 양도 보장
미리 결제한 시술권인 '선납진료권'의 양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꼼수 관행도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그동안 병원들은 '타인 양도 절대 불가' 또는 '직계 가족 1인에게만 양도 가능' 등 자체 규정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법률적 관점에서 선납진료권은 소비자가 병원에 대해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는 명백한 '채권'입니다. 민법에 따라 채권은 원칙적으로 타인에게 양도가 자유로워야 합니다. 병원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고객의 채권 양도 권리를 자의적으로 차단하고 제한하는 것은 고객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행위이므로 해당 조항 역시 삭제 조치됐습니다.즉 민법상 당사자 간의 특약으로 채권 양도를 금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업자와 소비자 간 거래(B2C)에서, 사업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약관 형태로 양도를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약관규제법상 고객의 권리를 타당한 이유 없이 배제하는 조항에 해당합니다. 선납진료권은 금전적 가치를 지닌 소비자의 재산권이므로, 병원 측에 특별한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처분 권한을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타당합니다.
지정 의료진 변경, 정당한 환불 사유 돼야
피부과나 성형외과의 미용 시술은 담당 의사의 미적 감각, 경력, 숙련도가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환자들은 특정 원장의 명성과 평판을 믿고 수백만원을 선결제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들은 "지정 원장이 퇴사하거나 휴진하더라도 다른 의사가 시술해 줄 수 있으니 환불은 안 된다"면서 버텼습니다. 이에 공정위는 고객이 병원의 대체 의료진 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약관 규정에 따라 정당하게 환불을 요구할 수 있도록 명문화했습니다.이처럼 의료 계약은 고도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민법상 '위임계약'의 성질을 지닙니다. 특히 미용 성형은 진료를 담당할 특정 의사의 전문성이 계약 체결의 결정적 동기가 됩니다. 따라서 병원 측 사정으로 담당 의사가 변경되는 것은 위임계약의 기초가 되는 신뢰 관계가 상실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는 민법 제689조에 따른 정당한 계약 해지 사유에 해당함을 명확히 한 합리적 조치라고 보입니다.
교묘한 면책 조항과 소송 금지 특약의 원천 봉쇄

일부 의원은 환불을 진행해 주는 조건으로 '향후 일체의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환자에게 강요하거나, 시술 전후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는 황당한 이유를 들어 병원의 법적 책임을 면제하는 조항을 두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업자의 고의나 중과실에 따른 법률상 책임을 부당하게 배제하고, 국민의 재판청구권 및 정당한 소송 제기 권리를 침해하는 명백한 불공정 약관으로 전면 무효 처리됐습니다.
이와 같이 향후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하는 '부제소 합의(특약)'는 당사자의 기본권인 재판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법원에서도 그 유효성을 매우 엄격하게 판단합니다. 하물며 정당한 환불을 빌미로 이 같은 면책 합의를 강제하는 것은 심각한 권리 남용입니다. 이번 조치는 소비자의 궁박한 처지를 이용해 병원의 과실 책임까지 덮으려던 악의적 조항을 약관 단계에서부터 차단했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높다고 보입니다.
이제 소비자는 병원과 계약서를 작성하고 덜컥 서명했더라도, 그 내용이 약관규제법을 위반하는 불공정 조항이라면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자는 병원 측의 "서명했으니 자체 규정대로 하겠다"는 엄포에 더 이상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 공정위의 시정 조치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던 미용 의료 시장의 계약 관행을 정상화하고, 건전하고 공정한 의료 소비문화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백광현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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