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로 세로 각각 19칸짜리 네모난 반상 위에서 동그란 흑돌과 백돌이 무한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며 세을 넓히고 서로를 잡아먹는다. 바둑은 인공지능(AI)의 공포를 가장 먼저 현실로 보여준 세계였다. 2016년 구글 딥마인드의 바둑 AI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은 이세돌의 1승4패로 끝났다. AI의 압도적인 능력이 가장 충격적인 방식으로 증명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AI는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발전했다. 산업은 물론 개인의 일상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AI가 주는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을 느낀다. 인간의 일자리가 AI로 대체될 것이라는 걱정과 인간의 설 자리 자체가 줄어들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AI와 인간의 공존이 시대의 화두가 된 지금 다시 바둑이 전면에 나섰다. 지난 21일 막을 내린 쎈수학·한경 기신전에서 신진서 9단과 현존 최고 성능의 바둑 AI 카타고가 세 차례 맞붙었다. 인간 대표 신진서는 1국의 완패를 딛고 2·3국을 내리 이겼다. AI 시대에도 인간이 만들어낼 영역이 있으며 AI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바둑계는 아직도 2016년의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알파고가 1국에서 승리한 뒤 구글 관계자는 “인간이 만든 AI가 승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은 “그 말이 오히려 더 섬뜩했다”며 “AI는 안전하고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는 설명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인간이 더 이상 최고가 아니라는 선언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10년이 흐른 지금 AI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AI는 더 이상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며 활용해야 할 존재가 됐다. 쎈수학·한경 기신전 역시 그 변화 위에서 출발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인간이 AI보다 강하다고 전제하지 않았다. 신진서는 두 점을 놓아 18집 반의 우위를 안고 대국을 시작했다. 2019년 이후 세계랭킹 1위를 지켜온 신진서가 두 점을 받고 대국을 한 것은 거의 20년 만, 그 자체로 낯선 장면이었다.
신진서에게는 제한 시간 5시간과 30초 초읽기 1회가 주어졌다. 카타고는 매 수 20초 안에 착수해야 했다. 인간이 AI보다 약하다는 현실을 인정한 뒤 인간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것이다. 이번 대국은 인간이 AI를 정면으로 이길 수 있는지를 묻는 승부가 아니었다. AI 시대에도 인간다운 경쟁이 가능한지를 묻는 거대한 사회실험이었다.
신진서에게 가장 큰 변수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세계 최강 기사인 그는 적절한 순간에 상대를 공격하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먼저 싸움을 걸어서는 안 됐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전체 흐름을 지켜야 했다. 출발할 때 확보한 우위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 세계 최강인 신진서가 ‘하수의 바둑’을 둬야 하는 상황은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인내를 요구했다. 신진서가 이번 대국을 준비하는 과정을 “수련”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1국은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난 대국이었다. 카타고는 두 번째 수부터 기존 상식을 벗어난 착점을 내놓았다. 신진서는 “그 수 이후 모든 수가 의심됐다”고 했다. 우하귀에서 손해를 보자 줄어든 집 차이를 만회하려고 중앙 전투에 뛰어들었다.
대회를 앞두고 “AI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고 했던 그였다. 하지만 AI를 이기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판단을 흔들었다. 결과는 완패였다. 이기기를 탐해서는 안 된다는 바둑의 오랜 격언 ‘부득탐승(不得貪勝)’이 현실이 된 한 판이었다.
2국과 3국은 완전히 달랐다. “바둑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이라고 돌아봤을 정도로 1국에서 큰 충격을 받은 신진서는 2국에서 목표부터 바꿨다. “불계패만은 하지 말자. 지더라도 끝까지 버티자.”
신진서는 2국 내내 카타고가 던지는 유혹을 인내심으로 뿌리쳤다. ‘지키는 바둑’과 ‘잔잔한 바둑’으로 판을 짰다. 조금씩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전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290수까지 이어진 접전 끝에 4집 반승을 거뒀다. 3국에서는 비교적 일찍 승기를 잡아 11집 반의 대승을 완성했다.
승부를 결정한 것은 화려한 묘수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우위를 잃지 않겠다는 극한의 인내심이었다. 박정상 9단은 “AI와의 대국은 감정도 결점도 없이 100점짜리 수를 던지는 상대에게 내 주먹이 얼마나 센지 시험해보는 듯한 느낌”이라며 “두면 둘수록 괴롭기에 프로기사들이 AI와의 대국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이번 기신전은 인간의 정신력과 한계 극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신공지능’으로 불리는 신진서는 누구보다 AI를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기사로 꼽힌다. 그러면서도 그는 “맞바둑으로는 AI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훌쩍 넘어선 사실상의 ‘바둑의 신’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진서가 AI의 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신진서의 평소 훈련에서 AI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약 30% 정도”라고 귀띔했다. 나머지 70%는 AI와 만들어낸 수를 혼자서 분석하고 소화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할애한다고 한다.
AI의 연산 능력과 데이터는 이미 인간이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에 올라 있다. AI를 흉내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의미를 갖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AI를 통해 발견한 길을 인간의 사고로 이해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바꾸는 일이다. 신진서는 이 과정을 통해 바둑을 진화시켰고, 이번 기신전에서는 두 점 치수에서 AI 파법까지 찾아냈다.

이 모습은 생성형 AI 시대를 살아가는 기업과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인간의 경쟁력은 더 많이 기억하거나 더 빨리 계산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기업 역시 AI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해서는 AI를 이길 수 없다. AI를 활용해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인간이 맡아야 할 기획과 책임, 창의성의 영역도 키워야 한다.
홍범준 좋은책신사고 대표가 쎈수학·한경 기신전을 기획하고 후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AI 시대를 살아갈 어린 세대에게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홍 대표는 “꿈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결과가 나왔다면 꿈을 이루려는 과정이 잘못된 것”이라며 “신진서는 1국의 실패와 2·3국의 승리를 통해 이 사실을 멋지게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어 “실패한다면 방법을 바꿔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AI가 압도적인 성능으로 인간을 앞지른 지금 인간이 공포에 눌려 도전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AI를 활용해 더 높은 수준의 성과를 만들어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AI를 거부하거나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AI가 바꿔놓은 환경에 맞춰 자신의 역할과 경쟁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알파고는 인간이 AI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쎈수학·한경 기신전은 그 다음 질문에 답했다. AI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신진서는 AI의 절대적인 우위를 뒤집은 것이 아니다. AI를 받아들이고 함께 성장하는 법을 보여줬다. AI를 가장 깊이 공부한 인간은 AI를 닮는 데 머물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다시 설계하며 또 다른 진화에 도전했다. AI는 인간을 바꿨다. 신진서는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줬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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