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으로 성장한 핀테크 기업의 A대표는 최근 한 벤처캐피털(VC) 대표에게 특별한 요청을 건넸다. 학력과 상관 없이 가장 재능 있는 젊은 창업자들을 소개해달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성사된 스타트업 창업자 네 명과의 만남은 당초 예정된 1시간을 훌쩍 넘겨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IT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A대표조차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신선한 창의성에 매료되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정형 데이터를 분석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전환하는 기술을 개발한 ‘알고릭스’의 권동한 대표(20)는 자립형사립고인 하나고 1학년 때 창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해커톤을 누비며 창업을 결심한 그는 대학 진학을 건너뛰고 회사에 전념했다.직원 대부분도 19~21세의 젊은 인재들로 채웠다. 120억원 투자를 받은 벌스워크의 게임 스튜디오에서도 고교 시절부터 합류한 최고기술책임자(CTO)와 아트디렉터가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지난 3월 실리콘밸리 기반의 사제파트너스가 주최한 ‘흑백개발자: 더 해커톤’ 대회에서도 고졸 개발자들이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오픈AI의 토큰을 영리하게 모아 서비스로 구현하고 수익화까지 이뤄낸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주인공 역시 고졸 개발자였다.
이처럼 현장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VC들의 시선은 IT 특성화고(옛 공업고)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카카오벤처스 관계자는 “유명 스타트업 출신 경력자나 연쇄 창업가뿐만 아니라 이제는 10대와 20대 초반 창업자들과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넓히고 있다”며 “주목받는 특성화고의 재능 있는 1~2학년생들까지 특별히 눈여겨보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용 광고 차단 솔루션을 개발해 43억원의 투자를 유치한 애드쉴드의 유주원 최고경영자(CEO·27) 또한 한국디지털미디어고 출신이다.
AI를 체화한 ‘AI 네이티브’ 세대가 과감하게 창업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베이스벤처스 관계자는 “기존의 틀이나 경험에 얽매이지 않는 10대 개발자들의 창의성이야말로 앞으로의 세상에서 통할 무기”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AI 시장으로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는 흐름도 힘을 보태고 있다. 올 상반기 인수합병(M&A)을 제외한 투자 유치 금액 상위권은 리벨리온과 엑시나(이상 AI 반도체 팹리스), 업스테이지(대규모언어모델 개발사) 등이 나란히 차지했다.
AI를 위협할 만한 새로운 기술 테마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AI 스타트업 프리미엄’이 공고해졌고, 국민성장펀드까지 가세해 기업 가치가 치솟고 있다. 투자 수익 극대화를 노리는 VC들이 숨은 원석을 발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이유다.
VC 업계 관계자는 “어린 시절부터 창업의 꿈을 키운 이들은 야망과 비전의 크기가 남다르다”며 “원석들을 잘 발굴하고 육성하면 머지않아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기업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진 기자 h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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