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월스트리트저널과 가디언 등에 따르면 나이지리아 출신 미국 작가 제리 팔라데의 범죄소설 <Call Me, I’ll Hide the Body>는 최근 미국과 영국 출판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데뷔작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맥밀런 산하 출판사 미노타우르는 14개 출판사가 참여한 경쟁 입찰에서 200만달러(약 28억원)가 넘는 계약금을 제시하며 출판권을 확보했다. 2028년 출간도 예정돼 있었다. 영화·드라마 제작사들도 출간 전부터 판권 확보에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출간을 앞두고 계약이 전격 철회됐다. 계약을 중개한 에이전시는 지난달 31일 출판사들에 이메일을 보내 “원고가 처음 구상 단계부터 완성본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더 확인할 수 없었다”며 원고를 회수한다고 밝혔다.
에이전시는 심사 과정에서 AI 사용 여부를 여러 차례 확인했고, 처음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작가의 설명을 믿었다고 했다.
에이전시는 원고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해 AI 탐지 프로그램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이후 면담 과정에서 작가의 설명이 이전과 달라졌고 더 이상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정작 원고의 완성도에는 이견이 없었다. 에이전시 측은 “모두가 사랑에 빠질 만큼 뛰어난 작품이었다”며 “어떻게 초고가 만들어졌든 소설 자체는 천재적”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문제가 된 것은 작품의 질이 아니라 ‘저작 과정의 신뢰성’이었다.
작가는 AI 사용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이야기와 인물, 문체는 모두 내가 만들었다”며 “시간 정보가 남아 있는 초고와 메모, 대화 기록 등을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현재 AI 판별 프로그램은 오탐률이 높아 신뢰하기 어렵고, 여러 편집자와 출판사 심사 과정에서도 누구도 AI 흔적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일각에선 에이전시의 결정에 윤리적 판단보다 저작권을 둘러싼 실무적 우려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생성형 AI가 원고 작성에 개입했다면 향후 저작권과 2차 판권 계약 과정에서 법적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팔라데는 이번 사태가 AI 논란을 넘어 인종적 편견과 연결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올해 대형 계약을 맺은 흑인 작가 세 명이 잇따라 AI 의혹에 휘말렸지만, AI 활용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일부 백인 작가들은 같은 수준의 의심을 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은 생성형 AI 시대 출판계가 직면한 과제를 드러냈다. AI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지, 또 일부 활용했다면 어디까지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서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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