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누가 뭐래도 이 그림, 모나리자입니다.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전 세계에서 이 그림을 보기 위해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으로 몰려들지요. 그림을 그린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여러 방면에서 혁신적인 창의성을 보여준 덕분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알려진 남자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다빈치는 엄청나게 산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시체를 해부했고, 그러다 갑자기 강물의 소용돌이를 그렸고, 뜬금없이 새의 날갯짓을 관찰하기도 했지요. 그 탓에 주문받은 그림은 그리다 멈추기가 일쑤였고,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67년의 인생을 통틀어 완성한 그림 수는 20점도 채 되지 않습니다. 다빈치 자신도 이런 자신의 산만함을 한탄했습니다. "누가 말해다오, 내가 한 일 중 이뤄진 게 하나라도 있는지. 제발 말해다오…."
이런 특성과 기록을 조사해본 현대의 정신의학자들은 다빈치를 보고 가설 하나를 내놨습니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우리가 ADHD라고 부르는 그 특성을 다빈치가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다빈치는 어떻게 '천재'의 대명사가 됐을까요.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무엇 하나 진득하게 끝내지 못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던 그 남자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지성이 되다니요. 오늘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다빈치의 산만했던 삶을 처음부터 따라가 봅니다.
다행히도 아버지의 집안은 혼외자로 태어난 레오나르도를 거둬 풍족한 환경에서 차별 없이 키웠습니다. 평민이라 성(姓)은 없었지만, 가문 사람들의 이름 뒤에 붙은 '다 빈치'(da Vinci, 빈치 출신이라는 뜻)라는 통칭도 쓰게 해줬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다빈치를 차별했습니다. 직업부터 차별을 받았습니다. 다빈치의 아버지 집안은 5대째 공증인을 지낸 집안. 공증인은 계약서와 유언장 같은 문서를 대신 써주고 효력을 보증하던 법률 전문직으로, 힘과 재력을 모두 가질 수 있는 좋은 직업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빈치는 공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가까운 대도시 피렌체의 공증인 조합(길드)이 혼외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빈치는 라틴어와 고전을 가르치는 학교에도 혼외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집에서 배운 읽기와 쓰기, 산수 정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불행으로만 작용한 건 아닙니다. 고전을 배우지 못한 다빈치는 남이 글로 적어둔 생각을 달달 외우는 대신, 자기 눈으로 관찰하고 직접 배우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의 노트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경험의 제자다." 실제로 당대에는 다빈치 외에도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 등 혼외자로 태어나 성공을 거둔 예술가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00년 뒤 다빈치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혼외자로 태어나는 행운을 누렸다." 정규 교육을 받고 공증인이 됐다면 다빈치가 그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잊혔을 거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건,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다빈치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정말 잘 그렸습니다. 이런 솜씨를 눈여겨본 아버지는 10대 중반의 그를 피렌체로 데려갔습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 겸 화가였던 베로키오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다빈치의 경력에 '신의 한 수'로 작용합니다. 베로키오의 공방은 그림과 조각뿐 아니라 청동 주조, 금속 세공, 건축 공사까지 받아 수행하는 '종합 작업장'이었거든요. 다빈치는 금속의 성질, 기계의 구조 등 이곳에서 본 공학적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습니다.
본업인 미술에서도 금세 두각을 드러냅니다. 스무 살 무렵 스승과 함께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게 된 다빈치. 그런데 다빈치가 그린 왼쪽 구석의 천사가 스승이 그린 다른 모든 인물보다도 생생했습니다. 어린 제자에게 실력으로 완패한 베로키오는 이 작품을 완성한 뒤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천사는 왜 그렇게 생생하게 보이는 걸까요. 당시 대부분의 화가는 형태를 선으로 먼저 그린 뒤 그 안을 색으로 채웠습니다. 그런데 10대의 다빈치는 경계선을 지우고, 연기가 공기에 스며들 듯 명암을 부드럽게 이었습니다. 훗날 '스푸마토'(이탈리아어로 '연기처럼'이라는 뜻)라 불리게 되는 이 기법은 후대 화가들의 표준이 됩니다.
그렇게 다빈치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피렌체에 널리 퍼졌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작품 의뢰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주문받은 그림을 제때 완성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이었습니다. 스물아홉 살이 됐을 때 받은 대형 주문, 수도원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계약 조건부터가 유난히 깐깐했습니다. 납기는 최장 30개월, 어기면 돈을 일절 주지 않고 그때까지 그린 그림을 무조건 수도원이 가져가는 조건. 물감값과 금값은 전액 화가 부담이었습니다. 그림 늦게 그리기로 유명한 다빈치가 제때 그림을 완성하도록 하려고 걸어둔 '안전장치'였습니다.

하지만 다 소용없었습니다. 다빈치가 게을러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어떤 의미로 지나치게 부지런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 서른 명이 서로 주고받는 빛과 표정을 전부 계산하려 들었거든요. 다른 화가라면 붓질 몇 번으로 타협했을 문제에 그는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림은 끝도 없이 늘어졌고, 결국 밑그림인 채 멈췄습니다. 수도사들은 기다리다 지쳐 15년 뒤 다른 화가에게 같은 그림을 다시 주문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완성을 못 하니, 피렌체에서 다빈치의 명성은 추락했습니다. 결국 일감을 찾지 못한 다빈치는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향합니다.

회사 생활이 늘 그렇듯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버티면서 열심히 하다 보니 다빈치의 실력은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출세작은 혼례 축하 공연 '일 파라디소'(1490년). "금박을 입힌 반(半)달걀 모양 무대, 행성으로 분장한 배우들, 유리 뒤에 촛불을 넣어 반짝이게 만든 별자리 장식이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자정에 커튼이 열리자 궁정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실적 덕분에 그는 마침내 스포르차 공작의 눈에 들었고, '기술자이자 화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실력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공작의 젊은 연인 체칠리아를 그린 '담비를 안은 여인'. 당시 초상화는 동전에 새긴 얼굴처럼 옆모습으로 그리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빈치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몸은 왼쪽을 향했는데 얼굴은 오른쪽에서 들려온 소리를 좇는, 방금 누군가 방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입니다. 다빈치의 노트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화가는 사람은 물론 그 사람의 마음까지 같이 그려야 한다." 영국 내셔널갤러리는 "다빈치는 사람이 행동과 표정으로 드러내는 내면까지 그리는 화가였다"고 평가했습니다.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도 이 시절에 나왔습니다. 당시 다빈치의 작업을 지켜본 어린 수도사는 기록했습니다. "어떤 날은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빵 한 조각 안 먹고 그렸다. 어떤 날은 사나흘씩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한낮에 달려와 붓질만 한두 번 하고 사라졌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수도원장이 스포르차 공작에게 "다빈치가 제대로 작업을 안 한다"고 일러바치자 다빈치는 수도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손을 놀리지 않을 때 가장 많이 일합니다. 지금 머릿속에서 구상을 끝내는 중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은 배신자 유다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지, 지난 1년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에 어울리는 비열하게 생긴 얼굴을 찾아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는데요. 지금 많이 급하신 것 같은데, 정 그러시면 수도원장님 얼굴로 유다를 그릴까요?"
물론 이는 다빈치가 수도원장에게 재치 있게 반격한 것일 뿐, 정말로 유다의 얼굴 모델을 찾느라 완성이 늦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수가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신할 것"이라는 말을 한 직후를 담은 그림. 그림 속에는 놀라 일어서는 사람, 칼을 움켜쥐는 사람, "저입니까?" 묻는 사람 등 다채로운 반응이 보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열두 제자가 각각 충격을 받아 보이는 반응. 그 반응이 서로 연쇄적으로 맞물리는 관계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설계하느라 완성이 늦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완성품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피렌체에서 '지각 대마왕'이었던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이런 명작들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월급쟁이 생활' 덕분이었습니다. 피렌체에서의 다빈치는 일종의 프리랜서였습니다. 원하는 만큼 쉬고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는 대신, 납기를 지키지 못하면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반면 밀라노 궁정에서는 이처럼 딱 떨어지는 마감이 없었습니다. 작품 마감이 늦어지면 눈칫밥을 먹긴 했지만, 잘리지만 않으면 월급을 계속 받으며 작품을 계속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빈치가 지나치게 한눈을 판다 싶으면 지적하는 상사도 있었고요. 덕분에 다빈치는 자신이 추구하는 완벽성을 한도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지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당시 벽화를 그리는 정석적인 기법인 '프레스코'는 벽의 반죽이 다 마르기 전에 재빨리 완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빈치는 재빨리 완성하는 데 전혀 재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른 벽에 물감을 얹어 천천히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완성 후 20년도 흐르지 않아 그림의 물감이 벗겨지기 시작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작품은 완성 당시에 비해 많이 훼손된 상태입니다.


스포르차 공작의 의뢰를 받아 준비한 청동 기마상도 완성을 눈앞에 두고 좌절됐습니다. 프랑스의 침략으로 전쟁이 벌어지자, 동상 재료였던 청동이 모두 무기 제작에 쓰였기 때문입니다. 다빈치가 10년 넘게 말(馬)의 해부학을 파고들며 준비한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밀라노는 무너졌고 후원자였던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다빈치는 노트에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공작은 나라와 재산과 자유를 잃었다. 그가 시작한 어떤 일도 끝나지 못했다." 이 문장은 청동 기마상 프로젝트를 좀 더 일찍 끝내지 못했던, 어느 일이든 좀처럼 끝내지 못하고 느리게 진행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이기도 했습니다.

노트를 보면 그가 얼마나 정신없이 이것저것 건드리고 다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노트 한쪽에는 바늘을 가는 기계의 설계도가 있습니다. "시간당 4만 개를 만들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계산의 곱셈이 틀려 있습니다. 물론 완성품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물이 움직이는 원리에 꽂혔을 때는, 물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낱말만 67개를 모았습니다. 비행 기계 설계도를 그려 놓고 옆에는 장 볼 목록을 적었습니다. 상식도 파괴했습니다. 100세 넘게 장수한 노인의 건강 비결을 알기 위해 노인을 해부하고 30페이지에 걸친 해부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때 다빈치가 그린 혈관 그림은 동맥경화에 관한 최초의 기록 중 하나로 꼽힙니다.

다빈치에게 그림 주문을 한 사람들이 이 노트를 봤다면 정말로 기가 막혔을 겁니다. '마감이나 지킬 것이지...'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이런 산만함은 결과적으로 그림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연구한 공학적, 해부학적 지식이 결국 그림이라는 종착지에서 하나로 연결됐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시신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다빈치는 인체의 구조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어느 신경이 어느 근육을 당겨 입꼬리를 올리는지 다빈치는 직접 찾아보고 기록했습니다.
그 결실이 모나리자입니다. 모델은 피렌체 비단 상인의 부인 리사 델 조콘도. 다빈치는 16년에 걸쳐 그림을 그렸습니다. 얼굴은 해부로 얻은 지식을 사용해 그렸습니다. 그 덕분인지 모나리자의 미소는 신비합니다. 입을 똑바로 보면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이나 뺨으로 시선을 옮기면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볼 때와 곁눈으로 볼 때 명암을 다르게 읽는다는 사실을 이용한, 절묘한 붓질. 그리고 미소 짓는 얼굴의 구조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 덕분이었습니다.


배경을 그리는 방식도 마찬가지. 물감을 안개처럼 얇게 수십 겹 얹어 윤곽선을 지웠고, 배경의 산과 강은 멀수록 흐리고 푸르게 칠했습니다. 멀리 있는 것이 공기에 가려 흐려지니, 이를 그림에 적용하면 멀고 가까운 정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공기원근법'을 적용한 겁니다. 이 역시 자연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다빈치가 개발한 기법이었습니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끝내 주문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이 작품을 죽는 날까지 곁에 두고 고쳤습니다. 다빈치에게 이 세상은 끝없는 탐구의 대상이었고, 다양한 분야를 산만하게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자신의 최고 걸작인 모나리자에 적용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았기 때문입니다.

실력은 너무 좋은데 그림을 받을 수가 없으니, 그 기다림은 원망과 비난으로 변했습니다. 다빈치의 시대를 살았던 문인 카스틸리오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다빈치는 세계 최고의 화가 중 하나다. 그런데 그 귀한 재능을 버리고 과학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후원자들은 하나씩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오르는 천재,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차지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광장에서 다빈치를 대놓고 모욕했다고 합니다. "밀라노에서 청동 말을 만든다고 해 놓고 수치스럽게 포기한 사람이 당신 아닌가."

다빈치에게 손을 내민 건 프랑스의 젊은 왕 프랑수아 1세. '왕의 수석 화가·기술자·건축가'라는 직함과 함께, 저택과 연금을 줬습니다. 납기도 주문도 없이 다빈치라는 천재를 궁정에 붙들기 위해 준 돈이었습니다. 예순네 살의 다빈치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프랑스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오른손은 이미 마비가 와 있었고, 더는 걸작을 그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다만 이 방문은 프랑스에 뜻밖의 선물을 남겼습니다.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가 갖고 있던 작품들을 사들였고, 그중에는 모나리자도 있었거든요. 왕실에서 전해져 내려온 모나리자는 지금 루브르박물관에 걸려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3년 뒤 다빈치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여러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다빈치는 신화가 됐습니다. 하지만 정작 뜯어보면 실제로 다빈치가 후대의 과학이나 공학, 의학에 기여한 것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낙하산과 헬리콥터와 전차를 발명했다'는 이미지도, 실물이 완성된 적이 없기에 절반만 진실입니다.

다빈치는 천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산만했고, 작품이든 기계든 완성한 것은 생각보다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다빈치가 한눈을 팔아서 후대가 가난해졌다"고 한탄했습니다. 물론 다빈치를 원망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쓴 것은 아니고,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뛰어난 재능이 제대로 쓰이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다빈치의 전기 작가 아이작슨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 한눈판 시간이 다빈치를 만들었다"라고요.
"누가 말해다오, 내가 한 일 중 이뤄진 게 하나라도 있는지." 다빈치가 노트에 되풀이해 적었던 그 질문에 이제 우리는 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혐오를 받으며 시체를 가르던 밤은 모나리자의 미소가 되었습니다. "마감도 안 지키면서 신선놀음을 한다"고 욕먹으며 물과 빛을 들여다본 시간은 그림 속 안개 낀 산이 되었습니다. 그가 벌여 놓은 일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가장 잘하는 일인 그림과 7200페이지에 달하는 노트로 흘러 들어가 쌓였습니다.
500년 전에는 ADHD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다빈치가 정말 그랬는지는 이제 와서 확인할 길도 없습니다. 납기를 어기면 그림을 빼앗기던 피렌체에서 다빈치는 패배자였고 실패자였습니다. 마감 없이 월급을 주던 밀라노에서 다빈치는 미술사를 바꿨습니다. 산만함은 그대로였지만, 환경과 자세에 따라 결과물은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혹시 벌여 놓기만 하고 끝내지 못한 일이 많다면,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제는 산만함이 아니라 환경일지도 모릅니다. 방향은 비록 여기저기로 흩어져도 다빈치처럼 탐구와 노력을 멈추지 않고, 꽂힌 것들을 어딘가에 잘 모아두고 분류한다면, 그 기록이 어디로 흘러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빈치 자신도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불리며 전 세계에 자기 이름이 알려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요.

<i>**이번 기사는 Walter Isaacson의 'Leonardo da Vinci'를 중심으로 Charles Nicholl의 'Leonardo da Vinci: The Flights of the Mind', 런던 내셔널갤러리 도록 'Leonardo da Vinci: Painter at the Court of Milan'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i>***'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은 전시와 행사가 집중되는 '서울 아트위크' 취재에 집중하기 위해 3주간 쉬어갑니다. 칼럼은 9월 12일에 돌아옵니다. 그 동안 아트위크 현장 소식을 비롯한 미술 기사와 콘텐츠를 더욱 풍부하게 채워 드릴 예정이니 지켜봐 주세요.</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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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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