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종전 81년을 맞아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전쟁 책임에 대한 ‘반성’ 문구를 뺐다. 지난해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가 13년 만에 부활시킨 표현을 다시 삭제한 것이다. 같은 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 등 자민당 지도부와 각료들은 야스쿠니신사를 잇달아 참배했다. 일본 보수 정치권의 역사 인식이 다시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의 노선으로 기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5일 도쿄 일본무도관에서 열린 정부 주최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는 나루히토 일왕 부부, 다카이치 총리, 전몰자 유족 등 약 4300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군인·군속과 민간인 등 약 310만명을 추모하며 정오에 묵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식사에서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이 “인도·태평양의 빛나는 등대로서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가해 책임을 염두에 둔 ‘반성’이라는 표현은 넣지 않았다.
이는 지난해 이시바 전 총리의 식사와 대조적이다. 이시바 전 총리는 2025년 추도식에서 13년 만에 ‘반성’이라는 표현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후 첫 종전의 날 식사에서 이를 다시 제외했다.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일본 총리의 전쟁 책임 인식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다.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처음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희생자를 추도했고, 이듬해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우리나라가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줬다”며 일본의 가해 책임을 보다 명확히 했다.
이 같은 흐름은 2013년 아베 총리 취임 이후 크게 달라졌다. 아베 총리는 아시아 국가에 대한 가해나 반성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없애고 전몰자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강조했다. 2020년에는 ‘역사의 교훈’이라는 표현도 사라지고 대신 ‘적극적 평화주의’가 들어갔다.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도 아시아 국가에 대한 가해 책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카이치 총리의 이번 식사는 이런 아베 노선을 다시 선명하게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인도·태평양의 빛나는 등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중국을 견제하고 안보 역할을 확대하려는 다카이치 정권의 색채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같은 날 야스쿠니신사에서는 보수 정치권 인사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이날 오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역대 방위상들은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종전의 날 참배를 대체로 피해왔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오노다 기미 경제안보담당상, 기카와다 히토시 어린이정책담당상, 기우치 미노루 경제재정담당상 등 각료들도 잇따라 야스쿠니를 찾았다. 자민당에서는 스즈키 슌이치 간사장, 아리무라 하루코 총무회장, 니시무라 야스토시 선거대책위원장 등 지도부가 함께 참배했다. 하기우다 고이치 간사장 대행, 후루야 게이지 중의원 헌법심사회장, 신도 요시타카 전 총무상 등 보수계 의원들의 참배도 이어졌다.
참정당의 가미야 소헤이 대표와 일본보수당의 햐쿠타 나오키 대표 등 보수 정당 지도자들도 야스쿠니를 찾았다.
다카이치 총리는 직접 참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스즈키 간사장을 통해 사비로 마련한 다마구시라고 불리는 공물을 야스쿠니신사에 봉납했다. 자민당 내부에서는 총리의 직접 참배를 피하는 대신 당 지도부의 집단 참배를 통해 보수 지지층을 배려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추도식 식사와 야스쿠니 참배가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과 대중·대한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고 지적한다. 다카이치 총리의 식사에 대해 전쟁 책임에 대한 태도와 중국에 대한 대항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아베 전 총리의 노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평가다. 자민당과 각료들의 야스쿠니 참배가 잇따르면서, 다카이치 정권 출범 이후 일본 보수 정치의 역사 인식이 한층 선명해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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