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둘러싼 새로운 전쟁의 승패는 자본과 기술이 아니라 24시간 끊기지 않는 안정적인 무탄소 전기가 가른다. 100조원 사업에 5조원 남짓한 분량이지만 5조원 전기가 없으면 100조원이 성립하지 않는다. AI 학습 장비는 1년 내내 최대 가동률로 돌아야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고, 해와 바람에 의존하는 재생에너지 단독으로는 감당하지 못한다. 오픈AI, 오라클, 소프트뱅크의 스타게이트는 향후 4년간 5000억달러를 투입해 10GW급 AI 인프라를 미국 텍사스에 세울 계획이며, 이 자본의 향배를 결정하는 유일한 조건이 ‘24시간 안정 전기’다.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가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도 같다. 두 나라는 반도체 설계·AI 인재에서 한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값싸고 끊기지 않는 전기를 즉시, 그것도 24시간 내줄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로 눈에 띈다. 사람과 기술은 돈으로 모시지만, 24시간 안정 전기는 미리 지어두지 않으면 그 순간 생산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계산이 있다. 원전을 넉넉히 지었는데 전기가 남는다면 손실은 이미 지어진 설비의 자본비 이자 정도에 그친다. 오히려 24시간 남는 전력은 그간 없던 신산업을 끌어오는 씨앗이다. 쌀이 남아돌면 막걸리 공장이 들어서듯 풍부하고 안정적인 전기 한 단지는 전력 부족으로 시도조차 못한 신산업을 불러들인다. 어떤 때는 횡재가 된다. 반면 전기가 모자라 유치 경쟁에서 밀리면 손실에는 상한이 없다. AI 데이터센터(AIDC)와 반도체 메가클러스터가 떠나고, 그들이 데리고 온 인재·자본·후속 투자까지 함께 증발한다. 한정된 손실은 무한한 손실 앞에 그림자도 되지 못한다. 비대칭을 인정한다면 답은 분명하다. 지금 필요한 만큼보다 확실히 더 지어두는 쪽이 합리적이다.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이 전략을 담아야 한다. 정량적 수치가 불확실한 향후 수요를 ‘딱 맞게’ 맞추기 위해 원전을 안전한 범위 안에서 최소한으로 배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수요를 낮게 보고 짓기를 아끼면 부족 전력은 곧 공급 거부 신호가 되고, 해외 자본은 조용히 떠난다. 1GW 부족의 손실은 1GW를 더 지어 남을 때 드는 이자 비용과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
우리가 부지를 검토하고 안전성을 논하는 사이 텍사스에는 굴착기가 돌아가고 중동 국부펀드는 GW급 부지를 사들이고 있다. 이 경매엔 마감 시간이 따로 공지되지 않는다. 신중함은 미덕이 될 수 없다. 늦게 도착한 나라가 받는 것은 두 번째로 좋은 부지가 아니라 텅 빈 손이다.
한국은 이 게임을 이미 한 번 해봤다. 1980년대 반도체 팹을 직접 짓기로 한 결정은 당시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팹이 들어선 자리에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이 모여들었고, 최고 수준 공정의 엔지니어 집단이 형성됐으며, 그 인프라를 보고 다음 투자자가 몰려왔다. 오늘 한국 경제의 상당 부분은 그때 심은 씨앗 위에 서 있다. AI 인프라 유치 경쟁도 똑같은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한다. 유치한 나라는 인재·생태계·후속 투자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고, 놓친 나라는 훗날 기회가 와도 다른 곳에 뿌리내린 클러스터를 상대로 원점에서 다시 뛴다.
여기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이 시대에 건물주가 될 것인가, 임차인이 될 것인가. AI·반도체 인프라를 유치한 나라는 세계가 쓸 지능을 직접 짓는 건물주가 되고, 유치하지 못한 나라는 그 결과물을 매달 빌려 쓰는 임차인이 된다. 삼성, SK, 네이버, 현대자동차가 AI를 자기 손으로 개발·통제하는 나라와 해외 빅테크의 청구서를 매달 받아야 하는 나라의 차이는 산업 주권 그 자체다.
만약 한국이 밀려난다면 그 이유는 기술도 인재도 자본도 부족해서가 아니라 24시간 안정 전기를 확실히 대주지 못해서일 것이다. 태풍·지진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짓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해 기회를 놓친다면 자연재해가 아니라 우리가 자초한 자책골이다. 대형 원전·소형모듈원전·부유식 원전까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시에 밀어붙이는 결단이 필요하다. 다음 시대 AI 건물주가 될 마지막 기회 앞에서 전기가 없다는 이유로 AI 임차인으로 밀려나는 역사를 우리 손으로 쓸 수는 없다.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