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세·U2무대 만든 그녀…서울에 경계 없는 집 짓다

입력 2026-08-20 17:29   수정 2026-08-22 10:41


에스 데블린(55·사진)의 이름은 몰라도 당신은 이미 그의 작품을 봤을지 모른다. 그는 세계 최고 무대 디자이너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폐막식 무대와 2022년 1억 명이 넘게 본 슈퍼볼 하프타임 쇼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고 비욘세, U2, 아델 등 수많은 팝스타가 데블린의 무대에서 노래했다.

그런 그가 시각예술가로 서울에 왔다. ‘세계적 무대 디자이너의 미술 나들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난 10년간 그가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37번의 전시를 열며 세계적인 미술 작가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20일 서울 북촌의 전시 공간 푸투라서울에서 개막한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는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이다. 2년을 들여 준비했고, 모든 작품을 서울에서 새로 제작했다. 데블린을 만나 이번 전시와 작품세계에 관해 들었다.
‘빛의 선’ 따라온 40년
데블린은 세 살 무렵 런던 템스강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강에 가라앉으며 물속에서 올려다본 빛줄기. 익사 직전의 어린아이에게 그 ‘빛의 선’은 삶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이후 데블린은 줄곧 빛의 선이라는 주제를 통해 삶의 즐거움 그리고 생명이라는 기적에 감사를 표현해 왔다. “제게 무대와 미술은 별개의 장르가 아닙니다. 지난 40년간 형태를 바꾸고 다듬으며 빛의 선이라는 주제를 일관적으로 표현해 왔어요. 그러니 비욘세의 무대 디자이너라는 소개는 기억에서 지워도 됩니다(웃음).”


서울 전시는 40년간 그가 걸어온 길을 집약했다. 데블린은 수십 년간 무대를 연출한 공력을 들여 이번 전시를 마치 체험형 공연처럼 구성했다. 관람객은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잠시 대기한 뒤 책 1만 권이 꽂힌 첫 방에 입장하게 된다. 곧이어 책 위로 영상이 덧씌워지고, 데블린의 목소리가 말을 걸기 시작한다. “요즘도 1주일에 책을 세 권은 읽어요. 서로 다른 시대를 살다가 간 타인들의 말이 쌓여 지금의 저를 이룬 거죠. 나와 타인 그리고 인간과 다른 생물은 그렇게 깊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겁니다.”

영상 속 서가가 열리면 탄성이 터져 나온다. 거울로 지은 미로가 관람객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울 속에 내 모습이 없다. 대신 옆 사람, 그 뒤 낯선 사람의 얼굴이 잡힌다. “누구나 거울에 다가설 때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안 보이면 놀라게 되고, 아이로 돌아간 듯한 즐거움을 느끼죠.” 데블린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을 때 사진 작가님이 보였고,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어요. 우리가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아보고 웃음이 났어요.”


거울 미로가 선사하는 체험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데블린은 “마술과 같은 효과를 의도했다”고 말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마술 쇼에서 물건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광경을 볼 때 관객은 한순간 자신이 알고 있던 현실의 물리 법칙에 관한 상식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그 덕에 관객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느끼며 자연스레 마음이 열린다는 것이다.

직후 관람객은 데블린이 넉 달간 그린 서울의 생물 250종을 타원형으로 배치한 설치 작품 ‘다시 집으로’를 만난다. 북촌, 북악산, 인왕산에 사는 각종 새와 곤충. 이들의 소리와 8개 언어로 노래하는 합창 소리가 방 안에 흐른다. “조사해 보니 서울에는 약 6000종의 생물이 살더군요. 인간은 그중 한 종에 불과합니다. 다른 시민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마음을 열고, 주변을 사랑하세요”
설치 작품을 타원형으로 설치한 데도 이유가 있다. 데블린에게 타원은 얼굴의 형태다. 그는 오래전부터 ‘얼굴 그림’으로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영국에 들어온 난민들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 연작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지금도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는 그가 제작한 인공지능(AI) 초상화 연작을 전시 중이다. 데블린은 “사람은 문패가 아니라 자기를 알아봐 주는 얼굴 앞에서 비로소 집에 왔다고 느낀다”며 “이웃인 다른 종(種)의 모습, 타인의 얼굴을 보며 ‘서울의 이 종들이 곧 내가 돌아갈 집이며 나 자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느껴 달라”고 말했다.

전시의 클라이맥스는 그 앞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이다. 관람객은 이곳에서 맞은편에 앉은 모르는 사람과 서로의 얼굴을 15분간 그리게 된다. 대화는 금지된다. 데블린은 “이 테이블이 사실상 전시의 전부고, 나머지는 이 순간을 위한 연출”이라고 말했다.

“그림 실력은 상관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는 점을 떠올려 보세요.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며 당신 안에 떠오르는 것,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진짜 작품입니다. 저는 당신이 그 변화와 만나도록 판을 깔아줄 뿐이에요.”


이렇게 완성한 그림은 전시장에 두고 가야 한다. 그 대신 다른 전시실에서 데블린이 30년간 쌓은 스케치를 이어 붙인 스크린에서 그림 한 장을 떼어 갈 수 있다. 이 세상과 사람이 동등하게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표현한 것이다. 관람의 마지막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방 ‘라인 오브 라이트’. 데블린이 평생 좇아온 빛의 선을 자연 속 조명으로 구현한 공간이다.

한 번뿐인 귀중한 삶을 타인과 나누고, 이 지구를 다른 생물과 사이좋게 함께 쓰자는 것. 예술의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돼 온 이 주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느낄 수 있는 전시다. 경계를 넘나드는 데블린의 능수능란한 솜씨 덕분이다. 데블린이 관람객에게 남긴 부탁은 하나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세요. 다만 시간을 충분히 들여 보세요.” 전시는 내년 1월 17일까지, 관람권은 2만2000원.

※에스 데블린의 심층 인터뷰와 화보집은 아르떼매거진 9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삼성바이오로직스현대차삼성전자트럼프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