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맛에 즐기는 술은 옛말…한국의 명주 알린다"

입력 2026-08-20 17:45   수정 2026-08-21 02:40


“전통주는 왜 럭셔리가 될 수 없을까.”

이 오랜 물음에 새로운 답을 적어 내려가는 세 사람이 있다. 한복을 입고 서울 인사동에서 외국인에게 우리 술의 미학을 전하는 조인선 모던한 대표, 안동 소주 페어링의 무한한 잠재력을 알리는 박준우 셰프 그리고 1200개 양조장의 데이터 위에 찻잎을 얹어 ‘K스피릿(증류주)’을 제안한 이재욱 술담화 대표다. 전통의 틀을 깨고 우리 술의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3인 3색’ 혁신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술처럼 즐기는 한 잔
'마시는 미술관' 연 모던한 조인선 대표
지난 19일 찾은 서울 인사동 ‘마시는 미(米)술관’, 누룩을 발라 만든 천장과 카운터 주변으로 각양각색의 술병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국 각지의 양조장·증류소에서 올라온 전통주들은 미술 작품처럼 진열장 안에 전시돼 있었고, 국내 공예 작가들이 만든 술잔이 함께 배치돼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한국 술을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감상하는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다. 마시는 미술관을 운영하는 조인선 모던한 대표(사진)는 기자와 만나 “한국 술도 이제 싼 맛에 마시는 술이 아니라 세련되고 럭셔리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했다.

조 대표가 이 공간을 연 건 지난달이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아쟁을 전공하고 전통 악기 연주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쟁을 들고 EDM이 흐르는 클럽 무대에 오르는 등 ‘전통의 세계화’에 대해 늘 고민해 왔다는 게 그의 얘기다. 전통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그런 일환이다.

그는 “한국의 위상은 높아졌는데 국제 만찬 행사 등에 오르는 만찬주는 왜 항상 와인, 샴페인일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며 “코로나19 시기 전통주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고 전국의 양조장을 찾아다니며 우리 술을 알릴 방법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가 현장에서 목격한 전통주는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맛과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장인들이 마케팅에 서투르다 보니 온라인 판로를 열어두고도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조 대표 얘기다. 조 대표는 “뛰어난 품질을 보유하고도 마케팅에 어려움을 겪는 제조사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싶었다”며 “인사동에 자리 잡은 것도 한류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에게 우리 술을 알리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위해 외국인이 수하물로 보내기 용이한 용기 위주로 제품을 선별하고, 감각적인 패키징이 돋보이도록 진열했다. 또 다국어 AI 키오스크와 맞춤형 추천 서비스(K-To-Go)를 도입해 외국인 접근성을 더욱 높였다.

조 대표는 “요즘 전통주는 디자인, 스토리텔링, 아티스트와의 감각적인 협업을 통해 맛을 넘어 시각과 감성을 자극하는 영역으로 진화했다”며 “단순히 술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일상에서 가장 친근하게 향유되는 또 하나의 예술 장르로 자리 잡게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 히비키 위스키가 브람스 교향곡에서 모티브를 얻었듯, 국악과 전통주의 멋진 컬래버레이션도 시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동 소주, 조화로운 한 잔
나라 소주 앰배서더 박준우 셰프
지난 6일 저녁, 서울 서촌의 ‘오쁘띠베르’에서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다. 국내 대표 와인 유통사인 나라셀라가 최초로 자사의 이름을 걸고 선보인 프리미엄 안동 소주 ‘나라 소주’의 첫 번째 페어링 디너 자리였다. 이 회사 앰배서더이자 스타 셰프인 박준우 셰프(사진)는 이날 만찬 전 인터뷰에서 “프랑스 샴페인이 식전주를 넘어 코스 전체를 아우르는 술로 자리 잡은 것처럼, 나라 소주 역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와인 및 수입 주류의 대명사인 나라셀라가 한국의 전통술인 안동 소주를 제조한 것은 외부의 시선에서도 신선한 도전이었다. 내년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세계적인 와인을 수입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세계 무대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만의 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승철 회장의 고민에서 프로젝트는 출발했다. 나라셀라는 3년간의 연구개발을 거쳐 경북 안동의 테루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소주를 개발했다.

베이스는 경북 예천·영주 등지에서 생산된 국산 쌀을 쓰고, 안동 풍산 증류소 인근의 깨끗한 지하 암반수를 정제해 사용한다. 이를 통해 쌀 특유의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질감, 향긋한 과일향을 살려냈다. 전통 안동 소주의 제조 방식을 기틀로 삼되, 누룩을 섭씨 15도 안팎의 저온에서 서서히 발효시키는 기법을 도입했다.

박 셰프는 “저온 발효와 고급 증류 기술 덕분에 은은한 꽃향과 과일향이 돌고, 입안에서 부드럽게 감기면서도 드라이한 풍미여서 다양한 요리와 잘 조화를 이룬다”고 소개했다. 이날 디너에서 박 셰프는 한식과 프렌치 테크닉을 결합한 퓨전 요리로 나라 소주를 코스 전체의 중심에 세웠다. 표고버섯 사블레, 잣즙 냉채, 흑마늘 떡갈비와 꿀 닭튀김 등의 요리가 각각 소주로 만든 칵테일, 하이볼 등과 어우러졌다. 마지막 녹차 케이크에는 나라 소주를 떨어뜨린 홍차를 곁들여 소주를 디저트 영역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전통 소주를 코스의 처음부터 디저트까지 아우르는 시도는 낯설 수 있지만, 우리 술이 샴페인 같은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 술의 세계화 전략에 대해서는 “한국 술에 호기심을 느끼는 계기는 영화, 드라마 등 문화적 장면인 경우가 많다”며 “정통성도 중요하지만 문화적 바이럴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친근하게 다가가는 전략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라셀라는 올 하반기 나라25(알코올 도수 25%)을 시작으로 나라43(43%), 오크통 숙성 버전 등을 잇달아 출시할 예정이다.
K스피릿 응축된 한 잔
茶로 증류주 제조 술담화 이재욱 대표
“우리 재료로 제대로 만든 K스피릿(증류주)을 제조하고 싶었습니다.”

전통주 큐레이션 플랫폼 ‘술담화’를 운영하는 담화컴퍼니의 이재욱 대표(사진)는 최근 “수많은 양조장의 술을 다루면서 소비자들이 어떤 향과 서사에 반응하는지 데이터를 쌓아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술담화는 21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전국 1200여 개 양조장의 제품을 판매해온 국내 대표 전통주 플랫폼이다. 그동안은 다른 양조장에서 만든 술을 유통하는 데 그쳤지만, 이달에는 직접 개발한 첫 제품인 ‘차차’(CHACHA)를 정식 출시했다.

통상 브라운 스피릿(갈색빛을 띠는 증류주)은 오크통 숙성을 통해 향과 색을 낸다. 그러나 이 대표는 베이스 스피릿이 되는 증류 원액에 찻잎을 직접 우려내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국내 주류업계에서는 처음 시도된 방식”이라며 “우리나라 재료를 바탕으로, 찻잎 침출을 통해 향·타닌을 잡아 40도 증류주로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베이스는 경북 예천산 사과·오미자·단수수를 발효 단계부터 한 통에 함께 담아 빚어낸다. 이후 두 차례 증류해 향과 질감이 안정적인 중간 60% 원액만 추출한 뒤, 보이숙차를 중심으로 아삼·실론 등의 홍차와 카카오닙스를 더한 추출물로 향을 낸다. 레시피 설계는 2024 골든 티 어워드 금상 수상자인 양태영 티 블렌더가 맡아 수백 차례 테스트한 끝에 알코올과 차향의 균형점을 찾았다는 설명이다. 이 대표는 “차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난 것을 넘어 어떤 찻잎을 어떻게 우리는지까지 따지는 소비자가 많아졌다”며 “차 음료와 티 클래스로 넓어진 관심이 주류 시장에서도 충분히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급성장하는 차 시장과 MZ세대의 달라진 음주 패턴을 고려했다는 게 그의 얘기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차 시장 규모는 약 4570억원으로 전년 대비 10.7% 커졌고, 2030년 6780억원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그는 “2030세대를 중심으로 다도 클래스와 ‘티 오마카세’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글로벌 티 브랜드의 국내 상륙도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주류 시장에서는 차를 중심으로 한 프리미엄 제품이 없었다”며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 대신 향과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는 새로운 K스피릿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제 포부”라고 강조했다.

정소람/안혜원 기자 ra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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