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XMT는 설립 당시 연구소도, 설비도 없었습니다. 자체 연구를 통해 기술을 개발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중국 최대 D램 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실체를 둘러싼 의미심장한 증언이 한국 법정에서 나왔습니다. 삼성전자에서 CXMT로 이직했다가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전직 연구원 전모씨의 말입니다.
이어 "CXMT는 설립 당시 연구소도, 설비도 없었으며 자체 연구를 통해 기술을 개발할 생각도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PRP는 D램 생산 과정 전반을 단계별로 정리한 일종의 공정 설계도입니다. 웨이퍼 투입부터 완제품 생산까지 필요한 공정 순서와 장비 운용 방식, 온도·압력·가스 같은 세부 조건이 담겨 있어 제조사가 오랜 기간 축적한 기술 경험이 집약된 자료로 평가됩니다.
삼성전자에서 28년간 근무한 전씨는 CXMT로 이직한 뒤 삼성전자의 18나노 D램 공정기술을 불법 취득·사용하는 데 가담한 혐의로 지난해 5월 구속 기소됐습니다. 검찰은 삼성전자가 약 5년간 1조6000억원을 들여 개발한 기술이 CXMT로 유출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씨는 올해 4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증언이 사실로 인정되면 삼성전자가 CXMT를 상대로 영업비밀 침해를 주장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습니다. 국내 수사·재판 자료를 토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하는 방안도 법조계에서 거론됩니다.
다만 전씨의 증언만으로 CXMT 차원의 조직적인 기술 탈취가 사실로 확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향후 재판에서 진술의 신빙성과 다른 증거와의 부합 여부가 더 가려져야 합니다. 앞서 검찰은 2024년 1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전씨를 포함해 CXMT 개발 인력 10명을 국가핵심기술 유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술유출 범죄 단속에서 국가핵심기술 유출 8건을 포함해 모두 179건·378명이 검거됐습니다. 전년 123건·267명과 비교해 건수는 45.5%, 인원은 41.5% 증가했습니다. 국가수사본부 출범 이후 가장 많은 단속 실적입니다.
해외 기술유출도 33건·105명으로 역대 가장 많았습니다. 국가별로는 중국이 18건으로 전체 해외 유출 사건의 54.5%를 차지했습니다. 베트남 4건, 미국과 인도네시아 각각 3건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단속 건수가 늘면서 경찰도 수사 체계를 보강하고 있습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안보수사국은 지난 20일 반도체·인공지능(AI)·이차전지·방위산업 등 기술유출 범죄 대응 인력을 자체 재배치를 통해 79명 보강한다고 밝혔습니다.
서울경찰청과 경기남부경찰청의 전담 수사조직을 확대하고 전국 시도경찰청에는 기업·대학·연구기관의 피해 상담과 범죄 예방을 담당할 산업보안협력관을 지정하기로 했습니다. 올해 들어 지난 7월까지도 기술유출 사건 68건에서 144명이 검거됐습니다.
수사 인력만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외로 국가기밀을 넘기는 행위를 어떤 범죄로 처벌할 것인지에 대한 형법상 틀도 73년 만에 바뀝니다.
개정 형법에는 제98조의2 '외국 등을 위한 간첩'이 신설됐습니다.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를 위해 이들의 지령·사주 또는 그 밖의 의사 연락 아래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전달·중개하거나 이를 방조하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기존 간첩죄는 '적국'을 위한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대법원 판례상 적국이 사실상 북한으로 한정되면서 중국 등 제3국이나 외국 기업과 관련된 사건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습니다.
개정법이 시행되면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가 연루된 사건에도 간첩죄를 적용할 법적 근거가 생깁니다.
다만 산업기술을 해외로 유출했다고 해서 곧바로 간첩죄가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출된 정보가 형법상 '국가기밀'에 해당하는지, 외국 등과 지령·사주 또는 그 밖의 의사 연락이 있었는지 등 구성요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산업기술보호법상 국가핵심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형법상 국가기밀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산업기술 유출 사건에 개정 간첩죄가 실제로 어느 범위까지 적용될지는 법 시행 이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구체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법을 손질하는 것과 별개로 기술유출 범죄의 처벌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는 여론도 강합니다.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달 19일 발표한 '핵심기술 해외 유출 대응 관련 대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2.5%는 핵심기술 해외 유출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심각하다고 답했습니다.
처벌 수준을 지금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도 90.7%에 달했습니다. 현행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5.3%, 완화해야 한다는 응답은 3.2%였습니다.
가장 우려되는 피해로는 '추격 국가와의 기술 격차 축소에 따른 국가 경쟁력 약화'가 53%로 가장 많이 꼽혔습니다. '국가 안보와 공급망 안정성 위협'(19.5%), '글로벌 시장점유율 하락에 따른 매출 감소'(16.4%)가 뒤를 이었습니다.
하상우 경총 이사는 "국민 다수가 핵심기술 해외유출을 단순 기업 차원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쟁력과 경제 안보를 위협하는 사안으로 보고 있는 만큼 신속한 제도 보완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핵심기술 해외유출에 대한 강력한 처벌법제 도입과 같은 경제 안보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핵심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한 '산업스파이 가중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할 예정입니다.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동시에 유출 징후를 조기에 파악하고 전문 인력이 신속하게 수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겠다는 취지입니다.
박 의원은 "반도체 패권경쟁은 이제 '누가 더 많은 공장을 짓느냐'의 경쟁이 아니다"라며 "누가 더 뛰어난 기술을 개발하고 인재를 지켜내느냐의 싸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도 21일 국가핵심기술과 국가첨단전략기술의 유출·침해 범죄를 지식재산처 특별사법경찰의 직무 범위에 포함하는 내용의 사법경찰직무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습니다.
현재 지식재산처 특사경은 특허권·영업비밀 침해 등 기술 관련 범죄를 수사하고 있지만 산업기술보호법상 국가핵심기술과 국가첨단전략산업법상 국가첨단전략기술의 유출·침해 범죄는 직무 범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특사경이 이들 범죄를 직접 수사할 수 있게 됩니다.
김 의원은 "국가안보 핵심 인프라에는 신뢰할 수 있는 국산 반도체를 사용하고, 첨단기술 유출 범죄에 전문 수사인력이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경제안보를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라고 짚었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처벌 강화와 함께 기술이 빠져나가기 전에 이를 막을 수 있는 예방 체계를 촘촘히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공정기술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투자를 통해 쌓이는 만큼 한번 경쟁사로 넘어가면 피해를 되돌리기 어렵다"며 "강력한 사후 처벌도 필요하지만 핵심 인력의 이동이나 기술자료 반출 과정에서 이상 징후를 조기에 포착할 수 있는 체계를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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