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가긍(可矜)한 처지에 놓였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이 그제 발표한 담화에 등장한 표현이다. ‘가긍’은 불쌍하고 가엾다는 뜻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올라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낯선 단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로 정례 한·미 연합훈련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가 애초 일정보다 조기 종료된 것을 비꼰 것이다.
북한의 노골적인 대남 선전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사상 검열기구인 선전선동부에서 잔뼈가 굵은 김여정의 담화는 유난히 거칠고 원색적이다. 호전적인 데다 고어·문어체 표현까지 섞어 상대의 감정을 자극한다. 외교적 수사를 걷어내고 상대방의 수치심과 분노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직설적인 문체다.
북한의 대남 담화 수위가 높아진 것은 2019년 2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후다.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 ‘겁먹은 개’(2019년 8월), ‘특등 머저리’(2021년 1월), ‘미국산 앵무새’(2021년 3월) 등 우리 정부와 대통령을 향한 분노 표출식 비난과 조롱은 이 무렵부터 쏟아졌다.
김여정의 노골적인 담화는 치밀하게 훈련된 북한의 대남 선전 전문가들이 다듬는다는 게 북한 고위직 출신 탈북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대남 전담기구인 통일전선부(현 노동당 중앙위 10국)에는 언어 감각이 뛰어나거나 문안 작성에 특화된 엘리트 인력이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표현을 놓고 경쟁하듯 더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문구를 골라내는 방식이다.
북한의 담화는 대남 전략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김정은이 2023년 12월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인 두 국가, 전쟁 중인 교전국 관계로 공식 규정한 이후 대남 담화에선 기존의 ‘남조선’ 대신 ‘한국’이란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우리를 향한 김여정의 막말 수위가 높아질 때는 역설적으로 북한의 처지가 궁지에 몰릴 때였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뒷배에 기대 미국과의 협상을 최대한 유리하게 끌고 갈 궁리를 하는 듯하다. 북한이야말로 ‘가긍’한 처지 아닌가 싶다.
이정호 논설위원 dolp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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