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의 홀로서기 공연 '묘묘', 스승 안은미를 마음 먹고 찢어냈다

입력 2026-08-25 17:28   수정 2026-08-25 17:45

김혜경의 홀로서기 공연 '묘묘', 스승 안은미를 마음 먹고 찢어냈다

"은미, 먹어!"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곱슬곱슬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안무가 겸 무용수 김혜경(44)이 붉은 토마토 두 알을 두 손아귀로 주물러 으깨더니, 객석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그의 18년 스승이자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안은미에게 형체도 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토마토를 건넨 것이다.



제자의 도발은 시작에 불과했다.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안은미의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그는 한층 가볍고 자유로운 몸짓으로 무대를 가로질렀다. 11년 전 그를 대중에 각인시킨 '봄처녀' 무대처럼, 맨발에 하얀 원피스 차림을 하고서다. 안은미컴퍼니 간판 무용수 김혜경이 마침내 선언한 홀로서기는 그의 독보적인 존재감만큼이나 강렬하고도 발칙했다.



세종문화회관의 여름철 기획 프로그램 'Sync Next(싱크 넥스트)'의 일환으로 열린 김혜경의 신작 '묘묘: 고양이 무덤'은 1990년대 안은미의 대표작 '무덤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와 김혜경 개인의 기억이 절묘하게 뒤섞인 공연이었다.

우연히 발음이 겹치는 고양이 '묘(猫)'와 무덤 '묘(墓)'를 한 단어로 합쳐 공연의 제목을 지은 것처럼, 김혜경만의 톡톡 튀는 위트가 무대 곳곳에서 반짝였다. 무용수 김혜윤, 임소정과 함께한 이번 무대는 김혜경이 7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다.

작품은 김혜경의 뇌리에 깊게 박힌 여섯 살 시절 기억에서 출발한다. 차에 치여 길가에 쓰러진 고양이를 발견했던 순간, 다친 병아리의 배를 실로 직접 꿰매준 기억은 그의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축적된 죽음과 상실의 경험은 김혜경 특유의 유연하면서도 파워풀한 몸짓으로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다. 고양이의 민첩성은 공중으로 솟구친 뒤 바닥으로 몸을 내던지는 동작으로, 유연성은 허리의 곡선을 강조하는 식으로 표현됐다. 하늘색·노란색·분홍색 가발을 나눠쓴 세 무용수가 고양이 털을 빗질하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펼쳐낸 관능적 몸짓도 인상적이었다.



공연 후반부 등장한 '토마토'는 스승 안은미의 '무덤 시리즈' 중 하나인 '토마토 무덤'의 메타포를 김혜경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장치다. 과거 안은미가 으깨지는 토마토를 통해 내면의 깊은 상처를 형상화했다면, 김혜경은 토마토에서 난자(알)라는 이미지를 길어 올렸다. 무대를 거침없이 누비는 무용수이기 전에 폐경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담은 것이다.

단순한 시각적 파격을 넘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장면도 이어졌다. 상의를 탈의한 채 하이힐을 신고 보랏빛 스커트를 두른 김혜경은 무대 위에 빛으로 그려진 사각형의 테두리를 끊임없이 걸었다. 또각또각 힘차게 시작된 걸음은 이내 어떤 생명체도 피할 수 없는 노화의 과정을 그리듯 절뚝임으로 바뀌었고, 곧이어 네 발로 엎드린 고양이의 형상으로 돌아갔다. 머리에 꽂은 하이힐이 고양이의 두 귀를 나타냈다.

공연 말미, 안은미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김혜경은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신명나는 춤판을 벌였다. 선우정아의 '봄처녀'처럼 중독적인 멜로디가 흐르자 일부 관객은 고개를 흔들며 리듬을 타기도 했다. 무대 위로는 고양이 인형이 우르르 쏟아졌고, 얼굴을 가린 무용수가 애도의 의식을 치르듯 바라춤을 이어갔다.



김혜경을 곁에서 오래 지켜본 안은미는 그를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오래 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조차 놓치지 않고 가슴 깊이 묵혀뒀다가 결국 자신만의 몸짓으로 틔워내는 무용수라는 점에서다. 김혜경의 깊숙한 내면을 내어 보인 이번 무대는 그의 무대를 기다려온 관객들에게도 기억에 남을만한 응답이었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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