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배 전문 인테리어 사무실에 있던 벽지가 든 상자를 들어봤다. 두 팔로 힘껏 들었지만 바닥에서 1~2㎝ 겨우 떨어질 뿐이었다. '도배 고수' 장보영 다올민 대표는 "키가 작고 말랐어서 처음엔 저도 상자를 들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젠 벽지 상자를 거뜬하게 짊어지고 현장을 향한다. 장 대표의 17년 경력은 삶을 다시 일으키는 발판이 됐다. 장 대표는 당시 정부에서 시행하는 경력단절여성 지원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그는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북구 다올민 사무실에서 진행된 한경닷컴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엄마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결심했던 때"라고 떠올렸다.

도배 기술을 배웠다고 곧바로 기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도배 현장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다. 일을 받으려면 방산시장 벽지 매장이나 현장 반장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실력보다 관계가 일감을 좌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장 대표는 현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를 "마치 '남탕에 가는 것처럼' 가면 안 되는 곳에 간 것 같은 느낌이 컸다"고 했다. 그는 현장에서 담배 심부름도 맡았다. 첫차로 출근해 막차로 돌아오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첫 달 수입은 단 50만원. 초보 시절 일당은 약 3만원이었는데 혼자 숙련공으로 일하려면 통상 3년가량 버텨야 했다. 업계에선 3년 차 일당이 15만~17만원, 숙련공이 28만~30만원 수준으로 책정돼 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하지만 맡은 현장을 끝내지 못하면 더 오래 일할 수밖에 없다.

도배 결과를 좌우하는 기준은 벽 상태를 읽어내는 판단력에서 나온다. 습기나 결로가 있는지, 훼손된 부분은 어떻게 메울지, 바탕 작업을 어디까지 할지 결정해야 한다. 같은 벽지를 써도 판단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진다. 장 대표는 "고객은 벽지를 보지만 전문가는 벽을 본다"고 강조했다. 유튜브 영상만 보고 기존 벽지 위에 새 벽지를 덧붙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혼자서 하루 한 곳을 맡아 일하던 기술자는 이제 20여명의 팀장·팀원과 일하는 대표가 됐다. 장 대표가 이끄는 다올민은 월 150건에 이르는 도배를 수행한다. 한 기숙사 건물 전체를 도배하는 작업을 열흘 만에 끝내는 전문가이자 인력과 현장을 책임지는 경영자로 거듭난 것.

사업은 순항 중이다. 도배 수요는 보통 봄·가을 이사철과 부동산 거래가 활발할 때 늘어나는데 코로나19 당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거 공간에 투자하려는 고객이 많아져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도배사들의 얼굴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장 대표가 입문할 때만 해도 50~60대 숙련공 중심이다 40~50대로 점차 낮아졌다. 최근엔 30대 도배사들이 현장을 누빈다. 다올민엔 외국어 시험 만점에 경쟁률 높은 회사를 다녔던 직장인도 합류해 현재 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팀장은 일한 만큼 가져갈 수 있는 데다 실력에 따라 성장 한계가 정해지지 않는 도배의 매력에 이끌려 벽지를 들었다.
하지만 '도배=고소득'으로 보고 뛰어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 장 대표의 말이다. 처음엔 체력이 달리고 현장마다 조건이 달라 수입도 일정하지 않다. 장 대표는 적어도 1년은 버티고 3~5년은 기술을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20명이 도배에 뛰어들면 한 명만 남을 만큼 고된 시간을 버텨야 한다.

장 대표는 "숨고는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했다. 다만 플랫폼은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줄 뿐이다. 장 대표를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은 기술과 신뢰에서 나왔다. 장 대표는 불필요한 공사를 권하지 않고 추가 비용이 발생할 가능성을 미리 알리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AI가 산업 곳곳에 확산하고 있지만 똑같은 벽이 하나도 없는 도배 현장에선 사람의 눈과 손, 경험이 필수다. 장 대표는 자신이 받은 기술을 돌려주기 위해 도배사를 양성하는 회사를 꿈꾸고 있다. 그는 "돌이켜보면 저도 누군가가 만들어준 작은 기회 하나에서 시작했다"며 "이제는 제가 누군가에게 그 기회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시대에도 고수의 숨결이 필요한 현장이 있다. AI가 일터를 뿌리부터 바꾸고 있지만 사람의 몫으로 남아있는 현장의 문제들은 그대로다. '고수의 숨'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상 속 문제가 전문가의 숨결을 거쳐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들여다본다. 장인부터 경력 전환자, 이색 직업 개척자, 지역 기반 전문가까지 다양한 고수의 이야기를 통해 AI 시대에도 대체되기 어려운 사람의 경쟁력과 전문성의 가치를 짚는다. <편집자주>
김대영/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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