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아들은 잠실 롯데콘서트홀. 서울 도심 10㎞ 남짓 떨어진 두 무대에서 지난 27일 정명훈(73)과 그의 막내아들 정민(42)이 동시에 지휘봉을 들었다.정명훈은 KBS교향악단을, 아들은 한경arte필하모닉을 이끌었다. 정명훈 부자가 같은 날 서울에서 각기 다른 오케스트라의 포디움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버지는 절제와 균형으로, 아들은 강렬한 에너지로 자신의 색을 드러냈다. 지휘하는 아들의 몸짓에는 아버지의 흔적이 보였지만, 음악만큼은 각자의 것이었다.
정명훈은 이날도 악보 한 장 없이 단상에 올랐다. 1부에서 들려준 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극심한 우울증을 겪던 라흐마니노프에게 재기의 발판이 된 작품으로, 러시아 특유의 묵직한 서정과 낭만성이 짙게 배어 있다.
정명훈은 지난해 프랑스 롱티보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세현(18)이 이 곡의 낭만성을 충분히 펼쳐낼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를 한 발 뒤에서 받쳤다.김세현이 느린 호흡으로 섬세한 결을 빚어내는 동안 정명훈은 오케스트라의 속도와 음량을 정교하게 조율하며 그 호흡을 끝까지 기다렸다. 3악장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연주에 깊이 빠져든 김세현을 바라보는 정명훈의 따뜻한 눈길도 인상적이었다. 젊은 연주자가 자신의 음악을 끝까지 펼쳐낼 때까지 기다리는 지휘였다.
2부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에서는 노련한 마에스트로의 면모가 한껏 드러났다. 비극적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줄리엣 무덤 앞의 로미오’에서 정명훈은 왼손으로 작은 불꽃 모양을 그리며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을 끌어냈다.
이어 허리 아래로 묵직한 손짓을 이어가며 단단하고 밀도 높은 음향을 만들어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197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 결선에서 정명훈이 연주해 공동 2위를 차지한 곡이다. ‘비창’은 정명훈이 2011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녹음한 작품이다. 아버지의 음악 인생과 맞닿아 있는 두 곡을 정민은 자신의 지휘로 풀어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 윤홍천(44)의 타건은 화려하고 대담하기보다 음정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날 정민의 고유한 색채가 드러난 곡은 ‘비창’이었다. 1악장 전개부에서 강렬한 팀파니 롤링을 충분히 늘여 잡은 뒤 다이내믹을 크게 끌어올렸다. 3악장 종결부에서는 갑자기 템포를 확 당기며 음악을 몰아붙였다. 긴장감이 커지며 이날의 ‘비창’은 오페라의 극적 장면을 연상하게 했다. 지휘하는 몸짓에서는 아버지의 흔적도 발견됐다. 수직과 수평을 오가는 손동작, 박자에 가속과 감속을 주는 방식, 예비박을 줄 때 지휘봉을 오른쪽 귀 뒤로 넘기는 습관까지 눈에 띄었다.
닮은 점이 보인다고 해서 음악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정명훈이 절제된 손짓으로 오케스트라의 균형과 밀도를 조율했다면 정민은 강약 대비, 과감한 템포 변화로 극적인 효과를 끌어냈다.
포디움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이날 늦은 저녁 함께 식사를 했다. 각자 공연을 마친 뒤 서로의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했다. 정명훈은 이날 자신의 공연을 떠올리며 아들의 무대가 궁금했던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오늘 프로코피예프 곡을 지휘하는데 차이콥스키가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아들이 공연을 잘하고 있나 궁금했던 거죠.”
허세민 기자/유윤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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