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제조 기업들이 해외 인공지능(AI) 플랫폼에 종속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글로벌 빅테크가 전력 공급부터 AI 반도체, 데이터센터, AI 모델, 최종 서비스까지 통째로 장악하는 ‘풀스택 수직 통합’ 경쟁에 돌입하면서다.
독자적인 공급 생태계 없이 외산 AI를 사다 쓰는 ‘도입’에만 매달릴 경우, 과거 일본의 수출 규제로 반도체 생산이 중단될 뻔했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위기’가 AI 무대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산업연구원은 6일 발표한 ‘글로벌 AI 풀스택 경쟁과 우리나라의 대응’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보고서는 글로벌 AI 시장의 승부처가 개별 부품·제품의 성능에서 가치사슬 전체를 묶는 완결적 생태계로 이동했다고 진단했다. 엔비디아의 칩-소프트웨어-클라우드 통합이나 구글·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의 자체 칩-AI 모델-클라우드 내재화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수직 통합 구도에서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단일 부품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가졌더라도 스택 전체를 쥔 해외 빅테크에 종속돼 언제든 대체 가능한 납품업체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외산 플랫폼을 도입한 국내 제조기업들 역시 빅테크가 장악한 표준에 묶이는 '락인(lock-in)' 효과에 갇혀 막대한 전환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유럽과 한국의 AI 전환(AX) 정책 순서가 엇갈리며 산업 경쟁력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도 꼬집었다. 유럽은 카테나-X, 가이아-X 등 기업 간 데이터를 자유롭게 공유·연계하는 공용 ‘데이터 스페이스’ 인프라를 2021년부터 선제 구축했다. 그 위에 지멘스 등의 산업용 AI 플랫폼을 얹어 라인 변경 시간을 수주에서 수시간으로 줄이고 부분 무인화를 실현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이 같은 공용 데이터 도로망을 깔지 않은 채 개별 대기업 위주의 ‘AI 팩토리 착수’와 도입 지원 사업을 먼저 앞세웠다. 그 결과 국내 공장들은 데이터를 정리하고 다듬는 밑작업(전처리)에만 전체 개발 시간의 70~80%를 쏟아붓는 등 기초 지능화 단계에 갇혀 있다. 국내 IT·운영기술(OT) 공급 기반을 키우지 않고 도입만 장려하다 외산 플랫폼에 안방을 내주는 악순환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보고서는 한국의 현실적 돌파구로 자본과 규모 중심의 ‘범용 지능 생산’이 아닌, 축적된 제조 역량 기반의 ‘산업 현장 구현(버티컬 AI)’을 꼽았다. 엔비디아나 구글 등 빅테크의 클라우드 AI는 실제 제조 현장에 바로 적용하기 어렵다. 공장 설비는 1000분의 1초 단위로 빠르게 돌아가기 때문에 위험 신호에 즉각 반응해야 하지만, 외부 클라우드 서버와 데이터를 주고받는 인터넷 통신 방식으로는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다.
핵심 기술이나 군사 기밀 유출을 막기 위해 외부 인터넷선을 아예 끊어버린 반도체·방위산업 등 폐쇄망 공장에도 인터넷 접속이 필수인 외산 클라우드 AI는 원천적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장 설비와 제조 데이터를 쥐고 있어, 기계 바로 옆에서 즉각 연산하는 에지(Edge) 기술과 현장 학습을 직접 완결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산업연구원은 정부가 AI 도입 지원 일변도에서 벗어나 국내 AI·OT 공급 산업 육성에 선제 투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아울러 미국과 유럽도 아직 차지하지 못한 제조 현장의 ‘자율운영 표준’을 선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현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정 이상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설비 간 자율 협조 규칙 같은 운영 표준은 오랜 제조 경험과 현장 데이터를 축적한 국가만이 정립할 수 있다”며 “한국이 이 운영 표준을 선점해야 외산 AI를 도입하는 소비자를 넘어 인공지능 자율제조의 규칙을 세우는 룰세터로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