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부 부채를 늘리는 것이 바람직한 때다. 부채를 ‘좋은 부채’ ‘나쁜 부채’로 가르는 기준은 어디에 쓰느냐다.”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020년 이탈리아 총리에 취임하기 전 한 말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1년 “인프라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오히려 인프라에 투자하지 않을 여력이 없다고 말하겠다”고 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도 2012년 말 취임 후 금리를 내리고 재정은 푸는 ‘기동적인 재정정책’으로 “경제 회생과 재정 건전화를 동시에 달성하겠다”고 자신했다.
결국 세 나라의 지도자들은 ‘좋은 빚과 나쁜 빚’ ‘건전화와 성장의 동시 달성’ 같은 수사를 내세워 과감하게 돈을 푸는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미국 일본 이탈리아는 주요 7개국(G7) 가운데 재정이 가장 위태로운 나라가 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오늘의 1만원을 내일의 10만원, 미래의 100만원으로 키우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빚 갚는 건 바보짓”이라고도 했다. 기획예산처는 지난 1일 821조원 규모의 내년 예산을 편성했다. 급증한 세수로 빚을 갚는 대신 162조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내년 국가채무는 1520조원으로 처음 1500조원을 넘어선다.
주요국이 인공지능(AI) 주도권 경쟁에 사활을 거는 시대에 우리도 과감한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결과다. 앞서 언급한 세 나라의 사례처럼 ‘일단 쓰고, 나중에 더 크게 불려서 갚는’ 재정 전략은 자연재해와 금융위기 등 예상 밖 변수를 만나 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잠재성장률 반등을 최대 과제로 꼽고 규제, 금융, 공공, 연금, 교육, 노동 등 6대 부문의 구조개혁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기초연금 개혁은 내년에만 재정 부담을 2조원 이상 늘리는 개악으로 끝났다. 교육 개혁은 ‘20.79% 자동연동제’를 끊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매년 교육교부금을 늘려주기로 약속함에 따라 반쪽짜리가 됐다.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등 나머지 구조개혁은 하나같이 미뤄지거나 오히려 후퇴했다.
내년에 풀기로 한 821조원이 ‘좋은 빚’이 되려면, 지금 정부가 서둘러야 할 일은 구조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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