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의 외환위기 트라우마는 이제 잊어야 합니다. 한국은 더 이상 대외 채무국이 아닙니다. 환율이 특정 레벨을 넘어선다고 해서 패닉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 9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KB증권 코리아 컨퍼런스 2026’ 특별 대담에서 한국 외환시장의 패러다임 변화를 짚으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4월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한은을 떠난 지 5개월 만에 공식 석상에 선 이 전 총재는 스티븐 앵글 블룸버그TV 아시아 수석 특파원과의 대담에서 재임 시절 겪었던 비화와 함께 외환시장 구조 변화,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이면, 글로벌 통화·재정 리스크에 대해 거침없는 진단을 쏟아냈다.
상반기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사상 최대 수준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음에도 원화 약세 압력이 이어진 것은 외국인의 국내주식 차익실현, 내국인의 해외 증권투자 확대 등 자본시장 관련 수급이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설명이다. 이 전 총재는 “한국은 이미 막대한 대외 금융자산을 보유한 순채권국이기 때문에, 환율이 오르면(원화 약세) 해외 자산을 보유한 수많은 국내 투자자들은 오히려 평가이익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총재 재임 당시에는 시장에 정부가 원화 약세를 용인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까 봐 대놓고 말하기 어려웠다”면서도 “특정 환율 수치에 얽매여 국가적 위기라도 온 것처럼 패닉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전 총재는 미·일 통화당국의 외환시장 공동 개입과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의 ‘엔화 약세 베팅 경고’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며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의 정책 당국자는 겸손해야 한다. 변동성을 완화(스무딩 오퍼레이션)할 수는 있어도 거대한 시장의 파도 자체를 인위적으로 조종하려 해선 안 된다”고 제언했다.
이 전 총재는 “미국의 대중 제재로 중국 기업들이 ASML의 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들여오지 못하면서 양국 간 기술 격차 축소가 지연된 측면이 있다”며 “만약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거나 중국이 자체 노광장비 개발에 성공한다면 판도는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현재 고대역폭메모리(HBM)뿐 아니라 레거시(범용) D램과 낸드 가격까지 오르면서 중국을 포함한 2위권 업체들이 막대한 현금을 쓸어 담고 있다”며 “이들이 축적된 유동성을 무기로 다음 하강 국면에서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설 경우 미래 반도체 생태계의 지형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짚었다.
빅테크 기업들의 인공지능 설비투자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도 “소수의 하이퍼스케일러만 살아남는 과점 구도로 굳어질 경우 전체 반도체 수요가 유지될 수 있을지 냉정하게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호실적에 따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일부 기업 내 노사 간 성과급 갈등에 대해서는 “사전에 노사가 합의한 원칙에 따라 분배해야 하며, 정부가 배당이나 성과급 산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향후 통화정책의 핵심 변수로는 △이란 전쟁 등 중동 정세에 따른 국제유가 추이 △정부의 12%대 재정지출 확대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 △오는 11월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무역·투자 규제 변화 등 3가지를 제시했다. 글로벌 채권 금리 급등의 근본 원인 역시 선진국들의 방만한 재정 적자 누적에 있다고 진단했다.
자신이 임기 중 도입했던 한국형 포워드가이던스(6개월 시계의 조건부 금리 전망)의 존속 필요성도 역설했다. 케빈 워시 미 연준 의장이 포워드가이던스 폐기 등 불투명한 커뮤니케이션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미국이 과거 너무 나갔던 가이던스를 되돌리는 것과 한국의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고 반박했다. 그는 “과거처럼 한은이 침묵으로 일관하면 통화당국 구성원들이 예측 역량을 키울 유인이 사라지고 장막 뒤로 숨게 된다”며 “한국 실정에 맞춘 자체 점도표 모델을 흔들림 없이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4년 임기 중 가장 큰 위기로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를 꼽았다. 이 전 총재는 “계엄 선포 직후 한 시간 만에 비상 거시경제·금융현안간담회(F4)를 소집해 무제한 유동성 공급 약속을 시장에 던졌다”며 “이후 해외 투자자들에게 한국은 과거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헌정 절차와 경제 정책 운용을 철저히 분리해 극복해 낸 회복력이 있음을 적극 소통하며 국가 신인도 추락을 막아냈다”고 회고했다.
전범진 기자 forwar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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