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이나 자동차처럼 목돈이 필요한 소비는 멀어졌지만 2030세대의 소비 욕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신 부담이 적으면서도 소장 가치가 있고, 자신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상품으로 지출이 옮겨가고 있다.
외식처럼 한 번 쓰고 사라지는 소비보다 손에 남고 다시 꺼내볼 수 있는 물건에 돈을 쓰겠다는 심리도 강해졌다. 큰 소비는 미루되 만족감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2030의 선택이 문구와 굿즈, 북 액세서리 시장을 키우고 있다.

평일 늦은 저녁 서울 을지로의 다이어리 전문점 '한주다이어리'.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매장 안은 다이어리와 노트를 고르는 2030세대로 붐볐다.
손님들은 가죽 커버를 하나씩 들어 색과 질감을 비교했고, 좁은 매장 안을 오가며 노트와 문구를 고르느라 분주했다. 계산대로 향하는 손님들의 손에는 어느새 여러 권의 노트가 들려 있었다. 지방에서 왔다는 한 손님은 "지방에는 이런 곳이 없는데, 여기가 유명하다고 해서 일부러 와봤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다이어리 제작 과정에서 남는 원단을 활용한 업사이클 제품 '글리프 노트'를 비롯해 연필, 클립, 북마크, 펜홀더 등을 판매한다. 1만원 안팎이면 가죽 커버와 내지를 골라 자신만의 다이어리를 만들 수도 있다.

최근 2030세대 사이에서는 이처럼 책과 문구를 둘러싼 '작은 취향 소비'가 빠르게 번지고 있다. 단순히 읽고 쓰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꾸미고 모으고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제품을 찾는 것이다.
실제 관련 상품 거래액도 크게 늘었다. 29CM에 따르면 지난 8월 11일부터 이달 10일까지 한 달간 '북 액세서리' 거래액은 전월 대비 57%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라이프스타일 오프라인 편집숍 이구홈 전 매장의 '북 액세서리' 거래액은 전월 동기 대비 2.7배 이상 뛰었다.
인기를 끄는 품목은 북커버와 책갈피, 독서대, 독서링 등이다. 프롬마이프렌즈의 꽃무늬 북커버는 29CM 앱과 이구홈 오프라인 매장에서 동시에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오이뮤의 식물채집 책갈피도 디자인과 소장 가치를 앞세워 관심을 얻고 있다.

오프라인 열기도 만만치 않다. 29CM가 지난 2일부터 닷새간 성수동에서 일본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LOFT와 연 문구 팝업에는 1만명 넘는 방문객이 몰렸다. 형광펜과 인덱스 스티커 등 책을 읽고 기록할 때 쓰는 문구류가 인기를 끌었고, 원하는 종이와 글귀로 직접 책갈피를 만드는 체험 공간에도 발길이 이어졌다.
팝업에 다녀왔다는 20대 정모 씨는 "요즘 밥 한 끼만 먹어도 몇만원이 금방 나가는데 식사는 먹고 나면 끝이지 않느냐"며 "비슷한 돈을 써도 문구나 굿즈는 귀엽고 오래 남아서 내가 쓴 돈의 가치를 더 오래 누리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월급이 넉넉한 편은 아니다 보니 쓸 때도 최대한 알차게 쓰고 싶다"며 "큰돈을 쓰지 않아도 좋아하는 물건을 하나 사두면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이런 소비에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덜 든다"고 했다.
민음사와 GS25가 선보인 '민음사빵' 품절 대란도 같은 흐름이다.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대하여',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등 문학 작품 제목을 딴 빵에는 세계문학전집과 시집 표지를 본뜬 투명 책갈피 20종 가운데 하나가 무작위로 들어 있다.
어떤 책갈피가 나올지는 포장을 뜯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원하는 책갈피를 얻기 위해 여러 제품을 사거나 소비자끼리 교환하는 모습까지 나타났다. 수집욕을 자극하는 '랜덤 굿즈' 방식이 더해지면서 제품은 출시 3일 만에 5만개, 열흘 만에 35만개가 팔렸고 GS25 전체 빵류 매출 상위권을 휩쓸었다.
빵에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책갈피를 더하면서 먹거리 하나가 수집 대상이자 취향 상품으로 바뀐 셈이다. 최근 독서와 기록을 세련된 취향으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텍스트힙'이 책을 넘어 문구와 굿즈, 식품으로까지 번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 같은 소비를 주도하는 세대가 디지털에 가장 익숙한 2030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일정과 메모를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할 수 있지만 굳이 다이어리를 사고, 펜으로 글씨를 쓰고, 책갈피를 꽂는다.시장조사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3월 전국 19~59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 아날로그 감수성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9.9%는 "디지털 기기 사용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아날로그 활동이 더 필요하다"고 답했다. "AI 기술이 발달할수록 아날로그적인 것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응답도 64.3%였다.
특히 디지털 의존에 대한 불안감은 20대 34.4%, 30대 33.6%로 다른 연령대보다 높았다. 종이 다이어리 구매 의향자들은 그 이유로 "손으로 쓰면 머리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서"(56.4%), "직접 써야 기억에 오래 남기 때문에"(49.5%) 등을 꼽았다.
하루 대부분을 화면 속에서 보내는 세대에게 직접 만지고 쓰고 보관할 수 있는 물건 자체가 새로운 효용이 되고 있는 셈이다.

경제적 부담도 이런 소비를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집이나 자동차처럼 목돈이 필요한 소비의 문턱은 높아진 반면 문구와 북 액세서리, 굿즈는 비교적 부담 없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 큰 지출은 미루면서 작은 소비로 만족을 채우는 것이다.
과거 불황형 소비가 싼 제품을 찾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최근에는 제한된 소득을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집중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단순히 가격 대비 기능을 따지는 '가성비'를 넘어 같은 돈을 써도 얼마나 오래 만족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식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도 소비를 자극한다. 고가의 옷이나 명품 가방이 아니더라도 책갈피나 다이어리, 작은 굿즈 하나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2030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비싼 것을 샀느냐'보다 '쓴 돈만큼 얼마나 오래 만족할 수 있느냐'가 되고 있다. 소비 여력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취향과 만족을 지키려는 심리가 문구와 북 액세서리 같은 작은 소비로 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희선 한경닷컴 기자 gimme_sun@hankyung.com
관련뉴스







